내 아이가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

영화 플립 인용

by 바크

내 아이가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



평소 잊고 지냈던 과거가 꿈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 또렷한 형체를 갖추고 내 앞에 섰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낸 A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고등학교를 올라가기도 전에 결별을 했고,

그렇게 좋았던 친구와의 우정이 산산조각이 나서 고등학교 때는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를 못했다.



그랬던 A와의 추억이 꿈에 그대로 투영되어 영사기처럼 화면에 뿌려댔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에 내 친구 진희를 통해 소개로 만났다. A는 다른 반 아이였는데 키가 크고 얼굴은 희고 길쭉길쭉한 몸을 가졌다. 영어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써서 항상 정갈하고 가지런하게 노트를 정리했다. 우리는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A는 서울 말씨를 쓰며 시간을 잘 지키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반면 나는 모든 게 맹추 같았고 서툴렀으며 어리숙했다. 똑 부러진 면이 없었고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성격이었다. 나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을 무렵이기도 하고 멋진 친구들의 영향을 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A와 나는 한 동네에 살았다. 다만 A는 비밀이 많았고, 우리가 일 년 이상을 지내고서야 그녀에 대한 비밀이 점점 궁금해졌다. 우리 집은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집이었고 집에는 우리 가족만 쓰는 화장실이 없었다. 2층에 세 들어 살면서 화장실은 1층 대문 옆 푸세식을 이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A는 우리 집에 종종 놀러 왔으며 부끄러운 우리 집이지만 또 숨기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A와 우리 집 중간에는 오락실이 있어서 우리는 자연스레 오락실을 들어가게 되었다. 1942 전투비행기 게임, 철권 게임, 여러 가지 남성향 게임들 속에서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테트리스 게임이 아닌 보글 보글이 었다.


2명이 할 수 있는 이 게임은 귀여운 공룡이 공주를 구하러 악당을 물리치는 게임이다. 지금처럼 입체적 이미지가 아닌 2D 이미지로 우리는 벽 따라 사다리를 타거나 점프를 해서 유령 고래를 피하고 적의 공격에 맞서서 다음 화로 넘어가게 된다.



A와 나는 게임 중독이란 걸 처음으로 겪었다. 때론 A가 오락실을 가자고 할 때가 있고 때론 내가 가자고 할 때가 있었다. 한 사람당 200원으로 우리는 점점 단계를 올라가며 거의 80 이상의 레벨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단돈 200원에 80 레벨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회귀를 하고 반복을 하며 그 단계를 익히고 노하우를 터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락실에 다니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어느 날 A와 하굣길에 오락실에서 한 판을 하기로 했다. A는 학교 가방을 둘 곳이 없어 우리가 하는 보글보글 게임기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고, 영혼을 바치듯 우리의 뇌는 보글보글의 공룡에 빙의되어 갔다.


게임을 한참 하고 마지막 목숨인 하트마저 다 써버리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에 일어날 수 있었다. 가방을 메려던 A는 자신의 가방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우리는 당황하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저녁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A의 아버지였다.



대뜸 쏟아진 말은 이것이었다.


너 같은 못되고 불량한 애를 만나서, 우리 딸이 원래 안 가던 오락실을 다니게 됐다는 말.


내 아이가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원망, A의 아버지가 말하는 그 나쁜 친구는 바로 나였다.


우리 집에는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집에 안 계시고 그 빈 공백을 A와 늘 함께 다녔는데 그게 어째서 나의 잘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계속 A가 오락실을 가자고 할 때가 있었다고 항변을 했지만, A의 아버지는 이미 나를 불량 청소년으로 취급을 했기에 너무 당황스러워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나는 A가 너무 괘씸했고, 그동안 참았던 것들이 한 번에 쏟아졌다.



A는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을 종종 하곤 하였다. 디지털 도어록이 나오기 한참 전인 90년대에는 열쇠를 가지고 다닐 때였다. A는 자신의 집이 최첨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문 인식으로 대문을 연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대금을 부르고 자신은 피아노를 치며 오빠는 기타를 연주하고 가족 연주회를 한다고 했다. 나는 A가 너무 부러웠고 집에 한번 초대해 달라고 했지만, A는 그럴 때마다 답변을 피했다.



삼총사로 지냈던 진희와는 A가 너무 거짓말을 하는 게 괘씸하다고 생각이 통하자 서로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정작 A는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량 청소년 취급을 받은 나는 A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별할 때 나는 A에게 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냐고, 너는 정말 떳떳하냐고 물었다. 슈퍼 컴퓨터가 있는 너의 집에 지문으로 문을 열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연주를 하는 너희 집에는 왜 초대를 하지 않냐고 서운하다고 했다.


A는 대답이 없었다. 몇 년 후에 진희가 A의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말을 들었다며 전해주었다. A가 말한 환상 속에 있는 가정환경과는 다르게 그녀는 그 집에 세 들어 살았다고 한다. 나는 하얗고 깔끔한 A가 너무 좋았지만,


거짓말로 포장된 친구를 용납할 수 없었고 아버지에게 혼이 날까 봐 나를 팔아서 오락실에 갔을 거라고 변명을 둘러댄 것이 상상이 되었다.



부모님들은 모르시겠지만, 가끔은 온전히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A가 그런 부모님을 둔 것이 부러웠다.


무조건 내 편이라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그렇게 잊힌 과거가 떠올랐을 때 나는 한 편의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플립이란 제목의 성장 영화인데, 거기서 할아버지는 손자가 거짓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여주를 피하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One's character is set at an early age.

I'd hate to see you swim out so far you can't swim back. It's about honesty, son.

Sometimes a little discomfort in the beginning can save a whole lot of pain down the road.


"사람의 인성은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단다. 나는 네가 너무 멀리 가버려서 돌아오지 못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정직함이라는 걸 말이야. 가끔은 처음에 조금 불편한 게 앞으로 느끼게 될 엄청난 고통을 줄여주기도 한단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이 대사는 성숙하지 못한 손자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다정하게 충고를 하는 내용이다. 아낌없이 친구를 소중하게 여기며 정직하게 말하고 사과할 것을 권유하는 할아버지의 진심 어린 조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나의 초점이 어른의 시각으로 어른의 대사에 집중되었던 이유가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의 가슴 아픈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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