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서 영어보다 중요한 것
내 이민 초기에 만난 수많은 이민선배들이 하던 말 들 중에 정말 이해 안 가는 것이, 캐나다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어가 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 수십 년을 산다면, 그 기간만큼 조금씩 영어가 느는 것이 당연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이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안다. 나도 수십 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나의 영어실력은 이민 왔던 그 시절에 아직도 머물러있다. 캐나다에 오래 살면 살수록 영어실력 자체가 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영어능력을 요렇게 저렇게 표현하고 이용하는 능력이 느는 것이다. 완벽하게 영어를 말하려는 생각을 점점 버리게 되고, 설사 단어 하나를 말하더라도 내 의사를 표현하려는 의지가 점점 커진다. 엉망진창 영어라도 입 밖으로 내뿜는 용기가 생긴다.
이민 초창기엔 커피 한잔도 편하게 사 먹을 수 없었다. 커피 한잔 주문해도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아, 일일이 알아들고 대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늘 가던 곳만 가고 먹던 것만 먹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스트레스를 받기 싫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부담스러워서 주로 공장일만 했다. 공장일은 처음에 몇 가지 지시사항만 들은 후, 그것에 따라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당한 일을 당해 화가 나도, 상대방의 영어를 알아들으며 싸우는 것이 더 스트레스여서 그냥 참았다. 내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 못하니 늘 답답했지만, 영어로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사실자체가 내겐 더 큰 스트레스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호구로 여긴다는 사실을. 주위의 누군가가 내게 가벼운 불만을 말할 때, 나의 입장을 설명할만한 영어실력도 의지도 없던 나는,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 후엔 내가 알아서 조심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잡일은 모두 내게 시키고, 일만 생기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캐나다에선 자신의 의견을 바로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상대방이 옳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나중에 상대방에게 그동안 나에게 했던 부당했던 일을 말해도, 늘 돌아오는 말은 그때 너는 왜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는 질문이다. 그래서, 어눌하지만 나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의 변명을, 정말 브로큰 영어로 띄엄띄엄 말했다. 그때 상대방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상대방의 행동에 불만이 있고,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정도는 알 수 있기에, 더 이상 부당한 행동을 이어가진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발음이 어눌하고 문법이 엉망이어도 계속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어눌한 영어로 계속 말하다 보니,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나의 어눌한 영어를 이해하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나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의 영어를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의 영어실력이 나보다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영어를 말하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 내 영어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을 기꺼이 들을 필요와 의지가 있다면,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실제로 나보다 영어 못하는 이민자들이 수두룩했다.
이곳에서 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주 쓰는 표현은 저절로 암기가 되어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말하기 전 미리 몇 가지 표현을 준비해 가면 된다. 살다 보니 중요한 것은 영어실력이 아니라 의지였다. 이민자가 현지인보다 영어를 어눌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이민자들의 영어가 유창해도 이민자들은 현지인과는 발음 자체가 다르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면 나 같은 사람도 상대방 발음을 듣자마자 이민자인지 현지인인지 금방 안다. 굳이 영어를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가 일하는 곳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최소한의 영어소통능력만 있으면 된다. 그 외 일상생활에선, 내가 자신 있게 말하면 대부분 상대방이 알아듣는다. 이민자들에게 영어는 기세이고, 자신감이 더 중요하다. 내가 말을 안 한 것은 내 책임이지만, 네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네 책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