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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04. 2018

부모와 나 사이

2018년 가을

내면의 세계는 유한한 것이어서, 정해진 공간을 쪼개서 써야하는 지도 모른다. 만약 신체적 성장에 맞춰 마음의 그릇도 성장을 멈춘다면, 비좁은 틈 사이사이를 메워서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그려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마다 캔버스의 크기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렸을 때는 많은 사람과 교류하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인 줄 알았다. 시간을 촘촘하게 짜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외향적으로 나를 가꾸는 것이 옳은 줄로 알았다.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나에겐 동시다발적인 관계 지향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내향적인 성향이 틀린 답이 아닌 걸 안다.


살면서 배운 것은 어떤 관계든 유지되는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는 손을 잡는 것과 비슷했다. 한쪽에서만 세게 붙들고 있는 경우에도 모양새는 유지되지만, 그런 일방적인 관계는 살아남기 어렵다. 서로를 잡아당기는 힘의 균형이 깨지면 서로 노력하여 극복해야 한다.  반대로 의미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았다. 세면대 물이 배수구로 빠지는게 당연한 것처럼.


페루의 이퀴토스의 정글에서 하룻밤을 묵던 날, 자체발전기 마저 꺼져 밤 9시가 되자 숙소 전체에 어둠이 내렸다. 아빠와 엄마, 나, 우리 세 사람은 초저녁부터 지쳐 일찍 누웠다. 시차 적응이 안돼 한밤중에 잠에서 깨니 엄마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창밖에는 가랑비가 촉촉히 내렸다. 고요한 가운데 아마존의 나무들이 살랑살랑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새벽 내내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엄마는 그날 밤 외할머니를 떠올렸다고 했다. 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의 인생의 한 챕터도 닫혔다. 애정만 가득한 관계가 어디 있으랴. 엄마의 엄마를 보내던 날, 엄마의 눈물에는 외할머니 인생만큼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겼다. “우리 엄마 이제 못 본다.” “나 이제 고아다.”라는 엄마의 농이 헛헛했다. 외할머니는 마지막 2년을 요양병원에 계셨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정신은 총총하셨다. 통화할 때 마다 “우리 예쁜 손녀”라고 추켜세워 주셨다. 외할머니의 부고가 닥쳐 지방으로 내려가던 길, 아빠가 운전대를 잡고 엄마와 뒷자석에 나란히 앉았다. 내려가는 길에 엄마의 손을 가만히 잡고 “엄마, 외할머니 돌아가시면 나한테 예쁘다고 해줄 사람이 없네.”하고 씩 웃었다. 당시 외할머니는 기력이 떨어져 대학병원 응급실로 급하게 이송되셨다. 내내 맥을 못 추시다가 아주 잠깐 눈을 떴을 때 당신 아들을 보시곤 “왔나.” 한마디 하셨다고 했다. 다음 날, 영원한 안녕을 맞으셨다.


어느덧 중년이 된 내 부모의 늘어난 흰머리나 약해진 체력, 작아진 키와 같은 노화의 증거들이 더 자주 눈에 들어온다. 몸이 고장을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 임에도 애달프다. 나는 에너지의 역치가 낮은 편인지 사람들을 만나면 금방 지친다. 더 힘 쏟는 관계가 발생하면 자연스레 다른 존재들의 몸집이 작아졌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도 그러했다. 뜻밖의 긴 휴가가 생겨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을 떠올린 건 내 부모와의 관계가 무의미하게 흘러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해보면 길지가 않다.


때때로 부모와 각을 세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생기는 건 나의 그물망에서 그들이 도태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으로 우겨본다. 내 생각을 상대방이 무한히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어리광이겠지. 그러나 내가 완벽과 거리가 멀고 나약함 투성이 듯, 나의 부모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내 부모를 인간으로서 감싸 안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아직은 서툴러서 서로를 상처입히지만. 나의 부모가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을 인정하고, 사회나 개인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그 세대의 양육 방법을 이해한다. 자녀가 자람에 따라 더 많이 외롭고 섭섭한 건 분명 부모 쪽이다. 내리사랑인 만큼 분명 밑지는 장사일테지. 그래도 나는 부모 복이 좋은 편이다. 속상하지만 자신의 부모를 끝내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그 편이 서로에게 이로운 관계도 있다.


모든 것은 섭리대로 흐른다. 나도 내 부모와도 영원히 작별해야하는 날이 올 것이다. 부모 자식이야 말로 하늘이 점지해준 관계다. 나는 찬찬히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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