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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pr 07. 2019

죽음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나요?

임종간호






컨디션이 조금만 달라져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데, 으로 자기 몸 가누기도 어려운 사람들은 더하겠지. 상대하는 의료진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지만, 환자나 보호자는 “예민할 권리”가 있다. 집을 떠나 병원이라는 낯설고 공포스러운 환경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 생각지도 않았던 경험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니  뾰족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에게 내색 않고 예의를 갖추는 환자들은 경외감마저 든다.


오늘 오랜 시간 병동에서 머물던 환자가 세상을 떠났다. 치료를 위해 금식을 “밥 먹듯이”하여도 매일 마주하는 간호사들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던 점잖은 분이었다. 그저 늘 인내하고 기다렸다. 속상하게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면역체계가 무너져 이상신호가 여러 군데서 감지되었다. 해열제를 써도 열이 가라앉지 않고, 검사 결과에서도 감염을 나타내는 지표들이 빨간불이 켜졌다. 입원 후 수개월, 심장을 포함한 여러 부분에 문제가 있어 투석을 하며 그 긴 시간을 꾸역꾸역 버티셨다. 기운이 없어 휠체어도 타기 어려웠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을 천장만 바라보셨을까. 좋지 않은 흐름은 휘몰아치더니 큰 바위 앞의 파도처럼 부서졌다.


“의사나 간호사 선생님들이 애써주신 것은 이해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돌아가시니 솔직히 원망스러워요.”


오늘 임종을 지켜보던 한 보호자가 나에게 한 말이다. 죽음은 누구에게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통계적 확률을 인지하면서도 “나는 아닐 것이다.”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아픈 이들은 많지만, “나와 내 가족은 그에 해당하지  것이다” 믿는 것이다. 의사가 수차례 사망의 위험성과 앞으로의 예후에 대해 설명을 하여도 직접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보호자들 조차 막상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은 내가 아닌 남의 이야기다. 그래서 저런 말을 들어도, ‘의사들이 얼마나 설명을 했는데, 이제 와서 또 그런 말을 하세요!’하고 차마 화를 낼 수 없다. 나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데, 어찌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식구로 거꾸로 대입하면 단번에 이해되는 일인데.


병원에서 일하는 내내 죽음의 한 면에 발을 두고 지내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경험한 삶과 죽음은 경계가 모호한 반면 결과는 명확했다. 선배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임종에 대해 적당한 선을 긋지 않으면 이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연차가 쌓일수록 이해하게 된다. 전의 환자를 보내고 침대가 채 식기도 전에 다른 환자를 같은 자리에 눕힌다. 참 비인간적이다 느끼는 찰나, 곧 이것은 일이고, 이다음 할 일이 줄 서있다는 냉소로 이어진다. 그 병동, 그 침상, 그 시점에 존재하는 환자만이 담당 간호사의 관심대상이다. 그렇  않고는  이 일을 할 수 없는지도 .


사망선고가 내려지고 간호사가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제공하는 간호를 ‘임종간호’라 한다. 임종을 맞이한 환자들은 직전까지 제공된 처치로 온 몸이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착되었던 모든 기계와 선들을 제거해드리고 혈흔이나 체액으로 오염된 몸이나 옷을 정리해 드린다. 보호자에게도 정서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해 드리고 싶지만, 상실을 대신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 쉬이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슬프지 않은  죽음 .


그래서 그저 마음을 담는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결례가 없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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