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Jun 01. 2021

보호자 없이 수술할 순 없나요?

현대인답게, 우린 모두 바쁘다. 마찬가지로 바쁠 보호자들에게 간병을 위해 병원에 있어줄 것을 부탁하노라면 나도 머쓱하다. 갑자기 휴가를 쓰면서 간병을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이런 불편함을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노라면 아직도 현실은 아직 갈길이 멀었다 싶다. 홍보가 꽤 되어 요즘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에 대해 문의하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이 서비스가 현재로선 일부 병동에 제한되어 적용 중이기 때문에 아직은 누릴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다.


전통적 형태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어찌어찌 방법을 찾는다. 그나마도 입원기간이 길어져 간병기간이 늘어나면 "일 년 치 연차를 전부 썼어요. 더는 못 쉬는데, 저 정말 이러다 회사에서 잘리게 생겼어요.” 하소연하는 보호자도 왕왕 보게 된다. 대안으로 사설 간병인을 부르기도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아 (각자의 주머니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월급을 그대로 바치게 되는 꼴일 테니 간병비와 병원비로 빚이라도 지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꼭 붙어하는 간병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많은 침습적 시술이나 수술은 보호자 없이는 진행하지 않는다. “자동결제 걸어놔서 문제가 생겨도 지불은 다 할 수 있어요. 그냥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진행해 주세요.”라고 덧붙이시는 환자분들도 더러 계신다. 그렇지만 단순히 뒤처리가 문제인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시술이나 수술 진행 도중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의식이 없는 환자 대신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 커서 보호자가 와야 한다고 설명을 넘어 설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의사결정을 맡겨야 하는 하는 만큼, "아무나" 보호자로 부를 수는 없다. 이때만큼은 법적 보호자인 ‘직계가족’에 해당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1인 가구나 비혼 가정 등 다양해진 가정의 형태는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이나, 늘 그렇듯 제도는 변화에 비해 걸음이 느리다. 보호자 없이 돌아가지 않는 현 병원 상황을 보며 간호사들은 “배우자나 자녀 아니면 누가 오겠어요. 저런 거 보면 결혼은 해야 하나 봐요.”하고 너도나도 한 번쯤은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설파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건 아닌지라, 정말로 부를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다. 독거노인이나, 무연고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가정을 꾸렸던 사람이라도 자녀 없이 배우자와 사별 혹은 이혼한 경우에는 부탁할 곳이 막연하다. 왕래도 없다가 느닷없이 집안 어른이라며 연락해선 먼 친척 조카에게 “내가 입원했는데 회사 좀 빼고 나와달라”는 말을 어찌하겠는가. 자녀가 있어도 사연이 있어 가족들과 절연한 상태인 분들은 사회사업팀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주민등록상으로 도움을 받을 사람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회는 되지만,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절연한 가족들 연락처 조자 말하기 꺼려하신다. "사정이 있어 연 끊은 지 오래됐어요. 죄송하지만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어렵게 연결된 보호자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오죽하면 저런 말을 할까 싶다가도 연락하지 않을 수 없는 절차들이 막막하다.


어느 어르신이 무연고자로 응급실 통해 입원을 했는데, 체격 있으셔서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움직이게 돕는 것조차 너무 버거웠다. 평소에 어떻게 화장실을 다녔는지 조차 가늠이 안되어 물었더니 화장실은 걷지 못하니 기어 다니고, 동사무소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가끔 집에 온다고 했다. 솔직히 이런 환자가 담당으로 배정되면 무척 난감하다. 원래 마쳐야 하는 간호 일에 간병까지 붙어 일이 무한정 늘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측은하지만, 간호사로서는 버거운 것이다. 물 떠다 주고, 식판 정리해주고, 화장실 도와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할 수 있겠지만 내 화장실 한번 가기 어려운 바쁜 상황에서는 그런 소소한 일조차 부담스럽다.


수술 후 관리는 또 어떠한가. 환자들은 수술 후 신체든 정신이든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데까지 시간이 소요되는데, 보호자 없이는 참 버거운 과정이다. 상황이 워낙 응급이라, 예외적으로 보호자 없이 수술을 진행한 독거노인 환자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수술 후 도움받을 곳은 전무하여 담당 간호사들이 애를 많이 먹었다. 사회사업팀에 의뢰를 하긴 했지만, 기력을 회복할 때쯤 '퇴원은 혼자서 어찌하나?' 막연하게 걱정이 됐다.


그러던 동안 같은 병실을 사용하던 한 환자의 보호자가 그 환자에게 말을 걸어주고, 간단한 일상생활을 챙겨주는 걸 자주 목격했다. 그 보호자는 더 나아가 직접 그 환자가 사는 곳의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퇴원하는 시점에 담당자에게 연락하면 퇴원 과정을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내용 전달이 누락될 것을 우려해 간호사에게 담당자의 전화번호와 함께 내용을 전해주었다. 퇴원이 확정되면 사회사업팀에서 해결해 주는 일이긴 하지만, 일면식 없던 사람을 위해 베푸는 그의 호의는 우리를 감동시켰다. 천사가 아닐까, 어떻게 저렇게 까지 해줄 수 있을까, 인계를 통해 상황을 뻔히 알던 간호사들에게서도 순수한 경탄이 나왔다.


나의 바쁨을 핑계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한편에 미뤄두고 귀찮은 일 취급했던 상황들이 내 얼굴을 붉힌다. 현실은 휘몰아치지만 이상은 늘 한자리에 있다. 아무리 사무적이고 기계적으로 변모할지라도, 결국은 인류애가 우리를 버티게 한다. 사회적 지지 체계가 닿지 못하는 정서적 틈새. 그곳을 어떻게, 무엇으로 채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다. 낯선 병원 환경 속에 처해진 환자에게 간호사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또 어디까지 할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너한테 간호 안 받을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