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산책

by 쓰는 미래



오후 3시는 걷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정오 때보다 다정해진 햇빛이 산 머리에 걸리고 산책길에는 사람이 드문 드문 다니는 시간.

점심이 어느 정도 소화가 되고 몸이 무거워질 마음을 먹는 시간.


해야할 일을 마치고 나서 마침 3시가 되면 나는 거리낌없이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걷기 시작한다.

행선지는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발길이 이끄는 대로.

운 좋게도 사무실에서 오른쪽으로 걸으면 유명한 해안 산책로가 있고, 왼쪽으로 걸어나가면 바다가 나온다.

이런 지리적 장점 탓에 오후 3시만 되면 몸이 근질 근질거리는 것이다. 마치 안보이는 목줄을 사무실에 매달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기분은 바다였다.

눈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탁 트인 뭔가를 하염없이 보고 싶던 날이었다.

미세먼지가 제로에 가까운 날이었고 무엇보다 구름이 아름다웠다.

구름만 그리는 작가가 있다고 들었는데 분명 그리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로 눈에 남겨두고 싶은 질감과 채도의 구름이 바다를 따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책을 나가는 내 발걸음도 둥실 둥실, 참 좋은 오후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러고보면 날씨에 기분이 참 많이 좌우되는 인간같아. 그지?

사람은 다 그렇지. 동물들도 그렇지 않을까?


나는 남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길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들 어디로 가는 건지 묻고 싶어진다.

나처럼 운동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이 시간에 어디론가 바삐 걷는 사람들. 저마다 자신 혹은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러 어디론가 가는 거겠지. 바다가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길 끝에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닥에는 스무걸음 정도의 간격마다 갈맷길이라고 쓰여져있다. 갈매기가 다니는 길을 나도 걷는 것만 같다.


방파제 근처로 들어서니 왜가리 한 마리가 있었다.

물이 빠진 자국이 짙은 회색이 되어 왜가리의 모습을 그림처럼 만들었다.

먹이를 찾는지 물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동도 없이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짠하기도 하고 추워보이기도 해서 잠시 멈춰서서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내 시선이 버거웠는지 금세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왜가리의 평온했던 식사시간을 방해해버렸다.


왜가리를 보니, 몇달 전 김해시에서 습지 과학관을 개관하며 황새 3마리를 방사하는 행사를 하다가 1마리를 폐사시킨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생각났다.

천연 기념물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황새들이 숨쉬기도 힘든 케이지 안에서 오랜 시간 기다리다가 스트레스와 탈진으로 죽게 된 일이었다.


케이지 문을 열자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몇 걸음 못가 쓰러지던 황새의 모습이 잔상처럼 가슴에 남았다. 그 이후로 황새와 비슷한 새만 보아도 문득 화가 나곤 했다.

이제 뉴스를 습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매일 황새가 겪은 것 보다 더한 일들이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산책을 하면 좋은 점은 핸드폰을 보지 않는 것이다. 시계도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 화가 누그러진다.


올해에는 최대한 화를 내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을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화를 내는 것에 자꾸 익숙해지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하루에도 몇번씩 얼굴에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야지, 나를 오염시키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한다.


한참을 걸어 오늘의 파도를 긴 시간을 들여 바라보고 돌아서는 순간, 정화된 마음이 물결처럼 잔잔하다.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물결처럼 내 마음도 그렇다.

한번씩 큰 파도가 되어버리는 이 물결을 내가 제어할 수는 없지만 알아차릴 수는 있다.

미리 경고등을 켜고 SOS를 보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위로가 되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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