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보다 더 어려운 출발 준비
한국 나이로 42, 직장생활 15년 차, 두 아이의 아빠인 나는 2021년 7월 가족들과 함께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7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끔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 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내가 여기 왜 온 걸까? 첫 마음부터 지금까지를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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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합격 소식을 듣고 리즈로의 유학길이 확정되었다. 2월부터 7월까지의 기간은 말 그대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과정 같았다. 아이들 학교 마무리,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 부모님과의 대화, 출국 일정, 기숙사 신청 후 대기, 비자 발급을 위한 준비... 합격하면 끝일지 알았는데 이제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영국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신경이 매우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1 천명대까지 떨어지던 코로나가 다시 늘어나 순식간에 1만을 가볍게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 긴 시간 준비했는데 내가 이걸 일 년 미룰 수 있을까? 그건 자신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늦은 것 같은데 내년을 기약하기엔 기다리는 1년이 10년처럼 느껴질 것 같았고 그럴수록 흔들릴 수도 있고 결국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 "어떻게든 가야 한다,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힘을 주는 시간들이었다.
아이들의 반응 "아싸 손흥민 본다! vs 나 영어 못하는데 어떡해? 엉엉"
아이들에게는 2019년 초 첫 해외여행을 다녀온 이후 틈날 때마다 다른 나라로의 100일 여행을 이야기하곤 했다. 이 과정을 긴 여행처럼 받아들여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아이들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 되도록 빨리 말하자고 했고 와이프가 아이들에게 먼저 이야기 꺼냈다.
딸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매사에 다 잘하고 싶은 욕심 많은 딸은 자기는 영어를 하나도 못하는데 어떡하냐며 울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가장 염려하고 있던 부분이기 때문에 그 반응이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반면에 아들은 런던에 가면 손흥민을 볼 수 있다고 신나 했다고 한다. 참고로 아들은 당시 몇 달 전부터 동네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본인은 영어를 굉장히 잘한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후 딸도 출국 전 두 달 정도 영어 수업을 들었고 다행히 출국 시점엔 아들과 같은 착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직장 동료와 주변의 반응 "응원해! vs 어떻게 준비하는 거야?"
사실 직장 상사와는 꽤 오래전 이야기를 나눴다. 2018년 여름, 외근 가는 길 택시에서 진지한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 트랙 위에 올라가 있으니 고려해 달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 당시 용기 있는 결정에 지지를 보낸다며 응원해주신 덕분에 더 힘 받으며 추진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반면, 유학이 준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료들에게 알리지 못하니 마음이 많이 답답했었다. 특히 2021년 초, 새해를 맞아 업무 분장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에 내가 소극적으로 반응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동료들이 마음속으로 내 욕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빠르게 말하고 싶었지만 떠날 날이 많이 남은 상황에서 분위기를 해칠 수 있어 꾹 참고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3월 초쯤 모두에게 오픈할 기회가 왔고 점심시간을 빌어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 축하하고 지지해주었고 "대단하다, 부럽다"는 반응과 함께 어떻게 준비하는 거냐, 얼마나 드냐? 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회사에 지원제도 같은 게 있냐는 것이었다? 가끔 공공기관, 대기업 그리고 언론사 등에서는 연수 명목으로 직원을 유학 보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순전히 내 돈 내산이었다. 그렇게 3월부터 5월까지 회사에서의 마지막 두 달은 주변의 응원 속에서 마무리하고 휴직을 떠날 수 있게 됐다.
어려운 출국 준비, "빨리 영국에 도착해서 자가 격리하고 싶다!!"
5월 초 일을 마무리하고 두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 그동안 만나지 못하던 지인들, 가족들과 인사 나누고 출국을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해나갔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항공권 예약과 비자발급이었다. 평소 같으면 항공권 발급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느 나라를 경유하느냐에 따라 입국 후 조치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무조건 싼 항공권 만을 찾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영국은 당시 Red, Amber, Green list로 국가가 분류되어 있었는데 Red는 지정된 호텔에서만 10일의 자가격리, Amber는 원하는 주소지에서 10일의 자가격리를 할 수 있었고 Green은 자가격리 면제국이었다. 결과적으로 가장 싼 터키항공을 예약하려다 터키가 Red list 국가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더 비싸지만 Amber list인 네덜란드를 경유하는 KLM으로 최종 확정했다. 평소보다 저렴한 60만 원대 가격이었다. (예매는 비자 발급 이후 진행)
비자 발급을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학교에서 CAS(Confirmation of Acceptance for Studies)를 받아야 비자 발급을 신청할 수 있는데 내 마음 같지 않게 느릿느릿 진행되어 2월에 합격했지만 5월 10일에나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건강검진을 받아 비자센터에 신청해야 하는데 코로나로 인해 비자센터는 일주일에 2~3일 오전에만 접수를 받았고 방문할 수 있는 날짜도 온라인으로 사전 신청 후 지정받아야 했는데 또 거기서 1~2주 정도의 대기가 있었다. 비자 신청 이후에도 언제 최종 발급될지는 복불복에 가까웠는데 당시 약 2~3주 이상은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자가 발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항공권을 먼저 예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자에 입국 가능한 날짜가 찍혀 나오는데 그날이 언제일지 정확하게 예상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집을 비우는 일정, 영국 기숙사 입주 일정 등은 모두 7월 2일을 기준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그날에 맞춰 출국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거금을 들여 안전한 급행으로 비자를 신청했고 6월 초에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출국 가능한 날은 6월 25일부터였기 때문에 결국 7월 2일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었다.
글로 모두 표현할 수 없지만 마지막 두 달은 세세하게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은 기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글에 자세히 쓰진 못 했지만 살던 집을 정리하고 나와야 했기에 집에 있는 가전제품, 가구 그리고 종이 한 장 까지 모두 체크하고 버릴 것, 기부할 것, 팔 것으로 나눠 처리해야 했다. 단기간에 당근 마켓 온도가 급상승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와이프와 "빨리 영국에 도착해서 자가 격리하고 싶다."는 말을 수시로 했을 정도다.
그렇게 그날은 왔다. 7월 2일 텅 빈 인천공항에서 온 가족이 무사히 출발했고 영국에 도착하자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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