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가족의 안착을 위한 여정
12월 중순부터 1월까지 방학이었지만 또 기말 리포트와 시험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다르게 이곳은 공식 시험기간이 새 학기 시작 직전 이더군요. 3개의 글을 쓰고 2개의 시험을 보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글을 남기게 되어 죄송하네요.
이전 글
마흔에 오른 영국 유학길(3) - 합격보다 더 어려운 출발 준비
안착을 위한 여정-자가격리 10일+
지난 7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10일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낯선 곳에서의 10일, 쉽지 않은 시작이었다. 기숙사지만 가구 정도만 있을 뿐 침구류도 없었고 물도 한병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마존, 이케아 그리고 딜리버루가 있어서 조금씩 사람 사는 집으로 변해갔다. 첫날은 두꺼운 점퍼를 이불 삼아 잠을 청했고 둘째 날부터는 (비록 커버는 없었지만) 이불도 덥고 잘 수 있었고 마트에서 대형 생수를 시켜 갈증을 해소하고 이케아에서 프라이팬과 냄비를 주문해 간단하게 끼니도 해결하기 시작하니 한결 나아졌다. 한국에서 떠나 올 땐 집을 완전히 비우는 게 큰 일이었는데 여기 오니 또 반대로 텅 빈 집을 채우는 게 큰 일이었다.
다행히 소소한 일들이 이어지면서 위로를 얻기도 했다. 그때 유로 2020 토너먼트가 진행되었고 잉글랜드가 결승까지 올라가 나름 그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고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그중 한 아이가 6년째 가족 기숙사에 살면서 터줏대감 역할을 하는 아이였다. 그때 우리 아이들이 굉장히 부끄러워 하긴 했지만 그때 인사를 나눈 친구들은 지금도 베프가 되어 잘 지내고 있다. 또 이곳은 아마존 같은 곳에서 배송이 왔을 때 사람이 집에 없으면 옆집이나 이웃에 맡기는 문화인데 한 번은 격리 중에 윗집 중국분의 짐을 맡아 줬더니 감사의 뜻으로 중국식 만두를 얻어먹기도 했다. 별 것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이래저래 마음이 허한 상황이었는데 순간순간 환대 받고 있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안착을 위한 여정-차는 살 것인가 말 것인가
PCR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해제해야 해서 결과적으로 12일 정도를 집에서 보낸 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에 가서 BRP(Biometric Residence Permits) 카드를 받는 일이었는데(이걸 받아야 합법적으로 체류가능) 학교가 시티센터와 가깝다 보니 처음으로 리즈 시내를 나가 볼 수 있었다. 나와 와이프는 집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장만하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시내에 진출했건만, 하필 너무나 뜨거운 날이었다.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휴식을 취한 시간 외에 아이들은 아무런 열정도 없이 흐느적거리기만 하다가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 이후에도 나의 학교 코스가 시작되기 전에 열정적으로 여기저기 다녀보려고 했으나 리즈는 도시 규모에 비해 대중교통(버스)이 꽤 불편했고(버스 도착 예정시간 정확도는 거의 0에 수렴한다.^^) 지하철도 없다 보니 주로 우버 류의 택시를 타게 되는데 이게 과연 지속 가능한가에 대해 고민하다 결국 차를 사기로 했다. 이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두 아이와 이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이게 합리적 선택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졌고 7월 말 한 2주 정도 집중적으로 중고차를 물색하고 결국 Nissan Note라는 한국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차를 장만했다.
구매 스토리는 너무 기니까 생략하고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만 적어보자면
- 영국에는 오토 차량 비율이 상당히 적고, 수동 모델과 가격차이가 상당함. (좀 싸다 싶어 보면 수동)
- 영국에서 처음 운전하는 외국인이니 보험료가 말도 안 되게 비싸다. 차값이 550만 원대인데 보험료가 270만 원 정도 나옴. (한국계 보험 대행사 같은 게 있어서 그곳을 통해 처리)
- 한국에서 보험사 통해 무사고 증명서 같은걸 받아오면 다소 할인이 됨
안착을 위한 여정- 아이들 학교 보내기
영국 오기전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이었다. 아빠 때문에 오긴 왔는데 영어도 못하고 친구도 없고 날씨, 먹는 것 뭐하나 익숙한 게 없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가족 기숙사 건물과 카운슬 하우스(임대 아파트?)가 모여있는 동네라 다른 주택 지역보다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 자가격리 중에도 밖에서 노는 아이들과 컨텍을 시도하는 모습을 아들이 보여주기도 했는데 자가격리가 끝나자 아들은 바로 그들 무리로 뛰어드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아들이 축구는 잘하는 편이라 금방 축구로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첫날 창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Do you know BTS?" "Do you know Sonny?" 영어가 짧은 아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는데 그 다음 날 놀러 나갔다가는 울면서 들어왔다. 아이들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다며... 아이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또 언젠가는 한번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기도 하다.
우리의 급선무는 아이들을 최대한 빨리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7월 초에 이곳에 왔고 이론적으로 7월 중순에 자가격리가 끝나면 바로 아이들을 학교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그래서 열심히 자가격리 중에 근처 학교 다섯 곳을 골라 지원을 했고, 며칠 후 가장 가까운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둘째(Year 2)는 자리가 있는데 첫째(Year 4)는 자리가 없어서 대기 명단에 올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여름 방학 시작이니 둘째의 첫 등교는 9월 개학에 맞춰 하자는 것, 조금은 실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확정이니 출발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과 달리 9월까진 학교 근처도 못 가게 된 상황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냥 집에서만 보낼 순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근처 축구 캠프에 보냈는데 방학을 맞아 많은 아이들이 캠프에 참여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가서 하루에 5시간 정도 어울렸는데 말은 안 통하지만 영어와 현지 분위기에 조금은 적응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고 아이들도 나름 만족하며 8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사이 아들의 학교를 확정하기 위해 계속 연락하고 시교육청에도 문의했으나 학교에서 결정해야 하고... 학교는 방학에 들어가 답이 없는 굴레에 빠져들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새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학교가 확정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 했다. (방학 중 한 학교는 연락이 왔으나 자리가 없다는 소식이었다.) 개학 후 나머지 학교 중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한 학교는 자리가 없다고 연락이 왔고 나머지 두 학교는 연락두절 상태가 이어졌다. 처음엔 아들도 학교에 안 간다고 좋아했지만 온 동네 아이들과 동생이 학교에 가는데 본인만 집에 남으니 외톨이처럼 느껴졌는지 시간이 갈수록 우울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런 시간이 2주쯤 이어지다 드디어 한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거리가 어중간해 차로 다녀야 했지만 너무 감사했다. 아들도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날 만큼은 진심으로 학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9월 말이 가까워질 즈음 아이들의 학교는 모두 세팅이 되었다. 지금이야 덤덤하게 쓰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가시밭길 같았다. 더 다행인 것은, 그 이후 한 달 반쯤 학교를 각각 다니다 11월 중순 쯤 딸의 학교에도 아들 학년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아 전격적으로 전학을 하게 됐고, 따로 등하교시켜야 하는 우리의 번거로움도 이젠 옛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 이야기는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일단 입학까지만 써야겠습니다. 다음에 아이들 이야기는 또 써봐야겠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 글은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전 글
마흔에 오른 영국 유학길(3) - 합격보다 더 어려운 출발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