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반복된 경제위기, 체력이 바닥난 지금
1997년 겨울, 한국은 국가 부도의 문턱에 섰다. IMF 구제금융 협약서에 서명하던 그날, 거리의 사람들은 금반지를 모았다. 국가는 외환을 지켰지만 기업은 쓰러졌고, 사람들은 일터를 잃었다. 정부는 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구조조정의 칼을 들었고, 그 칼끝은 노동자에게 향했다. 실업률은 두 배로 뛰었고 '정리해고'는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IMF는 국가를 구했지만, 사람은 견뎌야 했다. 그것이 한국형 위기관리의 첫 번째 공식이었다.
몇 해 뒤, 상처를 봉합한 정부는 내수를 살리겠다며 신용을 풀었다. 신용카드가 곧 소득이던 시절, 사람들은 카드로 밥을 사고 카드로 빚을 갚았다. '현금서비스'는 생계의 연장이었고 '돌려 막기'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2003년, 그 순환이 끊겼다. 정부는 부실을 막겠다며 카드 발급을 제한하고 현금서비스를 줄였다.
정책의 목표는 금융시스템의 안정이었지만, 이미 빚으로 버티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생계의 끈을 자르는 조치였다. 그해 신용불량자는 40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경제활동인구의 약 18%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가족까지 합치면 천만 명 이상이 신용 회복의 늪에 빠진 셈이다. 시스템은 안정됐지만 서민경제는 무너졌다.
이후 정부는 카드대란 이후 무담보 신용대출을 죄는 대신, 2004년부터 주택담보대출을 적극적으로 풀었다. 신용이 위험하니 담보를 잡으라는 논리였다. 저금리와 세제 혜택이 맞물리며 부동산 시장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그때부터 가계부채의 중심은 신용에서 집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이제 '카드' 대신 '집'을 담보로 살았다. 2005년, 주택담보대출이 전체 가계부채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국의 부채 구조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용대란은 사라졌지만, 대신 '하우스푸어'가 생겼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풍경은 달라졌지만, 흐름은 되풀이되고 있다. 정부 들어 세 번째 가계부채 대책인 '10·15 대책'까지 고강도 규제가 이어지자 이번엔 방향이 거꾸로 바뀌었다. 주택담보대출의 문턱이 높아지자 신용대출이 다시 불어나고 있다. 마이너스통장과 예·적금담보대출로 수요가 이동하며, '주담대 → 신용대출'의 풍선효과가 또다시 재현됐다. 지난 10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의 신용대출은 전월보다 1조 519억 원 늘었다. 9월의 증가 폭(3,200억 원)에 비해 한 달 만에 세 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돈의 흐름은 언제나 규제의 틈새를 찾아 움직이고, 정책의 칼날이 바뀔 때마다 위기의 얼굴도 모양을 바꾼다.
정부가 금리를 올리고, 대출 한도를 줄이며, 세제를 강화하는 지금도 정책의 명분은 언제나 같다. "가계부채를 잡아야 국가가 산다." 그러나 그 말은 어딘가 익숙하다. 카드대란 때도, IMF 때도 우리는 같은 문장을 들었다. 그리고 매번, 가장 약한 사람부터 흔들렸다. 이번에도 금리 인상과 대출 제한의 충격은 변동금리 대출자와 청년 실수요자, 자영업자에게 먼저 닿고 있다.
한때 미국도 같은 길을 걸었다. 내수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정부와 금융기관은 신용도가 낮은 서브프라임 등급의 차주에게까지 대출을 열어줬다. 집 한 채가 꿈이던 시대, 부동산은 모두의 희망이자 투자였다. 하지만 그 신용이 부동산 가격 상승에만 기대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버블이 꺼지자 금융기관은 줄줄이 파산했고, 세계 경제가 흔들렸다.
미국 정부는 무너진 주택금융 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을 앞세워 부실 채권을 떠안았다. 이들 기관은 평소 전체 주택담보대출의 40% 이상을 보증하며 시장의 완충재 역할을 했다. 위기 때 이 '충격 흡수 장치'가 있었기에 개인 파산이 금융 시스템 전체로 번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수백조 원의 구제금융이 투입됐고, 시스템은 다시 살아났지만 그 대가로 남은 건 막대한 공적부채였다.
만약 한국판 '서브프라임' 부동산 붕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우리에게 페니메이나 프레디맥처럼 부실을 흡수할 기관이 있을까. 지금 한국에는 그런 '완충 장치'가 사실상 없다. 주택금융공사나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가 부분적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시장 전체의 충격을 떠안을 규모나 권한은 부족하다. 결국 위기의 충격은 금융권과 개인에게 직접 전이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정부는 그만큼의 구제금융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까.
올해 들어 8월까지 나라 살림 적자는 88조 원을 넘어서며, 코로나19 이후 역대 두 번째 규모로 불어났다. 국가채무는 1,261조 원. IMF는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2030년에는 64%까지 치솟을 것이라 경고한다. 선진국 평균(약 120%)보다는 낮지만, 증가 속도가 문제다. 2019년 40%대였던 부채 비율이 불과 10년 만에 20% 포인트 이상 뛸 전망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증가 속도다. 재정의 경고등이 켜진 지금, 국가의 재정 또한 더 이상 '버팀목'이 아니다.
한국의 위기사는 붕괴의 연속이 아니라 전이의 연속이었다. 위기는 형태를 바꿔 찾아온다. 하지만 대응의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 정부는 언제나 '시스템의 건전성'을 앞세우고, 그 비용은 늘 아래로 흘러간다. 국가의 부채는 기업으로, 기업의 부채는 가계로, 이제는 개인의 부채가 사회 전체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한국형 위기관리의 공식은 30년째 바뀌지 않았다. 다음번에도 똑같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번엔, 버틸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국가에도, 가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