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으로 길들여진 사회, 100년 교육 시스템의 청구서
2025년 11월 14일 목요일 아침, 대한민국이 멈췄다.
지하철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달리기 시작했다. 출근 시간을 조정한 기업들 덕분에 도심 도로는 한산했다. 오전 8시 10분, 전국 1,800여 개 시험장 반경 200m 이내에서는 자동차 경적이 금지됐다. 8시 40분부터 오후 5시 45분까지는 시험장 인근에서 공사와 집회도 멈췄다. 오후 1시 5분부터 35분간, 전국의 모든 공항에서 항공기 이착륙이 중단됐다. 영어 듣기 평가 시간이었다.
수험생 52만 명을 위해 나라 전체가 하루 동안 일정을 조율했다. 지각할 위기에 처한 학생은 경찰차가 나섰다. 전국 경찰서에서 준비한 '긴급 수송 차량' 297대가 대기 중이었다. 교문 앞에는 후배들이 나와 응원 현수막을 들었고, 학부모들은 엿과 찰떡을 손에 쥐고 서 있었다. "붙어라", "찰떡처럼 붙자"는 주술적 염원을 담아서.
언론은 이 풍경을 담담하게 보도했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면 반복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연례행사로.
그런데 이게 정말 정상인가?
한 나라가 하루 동안 멈춰 서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시험을 치르도록 돕는 광경. 비행기가 뜨지 않고, 도로가 비워지고, 경찰이 학생을 실어 나르는 이 거대한 의식. 이것이 '교육'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
수능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줄임말이다. 대학에서 수학(修學)할 능력이 있는지 평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험이 평가하는 건 정말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일까? 5지선다형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푸는 능력? 주어진 지문을 신속하게 분석해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무엇을 위해 이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해 왔을까?
2024학년도 대학 진학률은 71.5%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10명 중 7명이 대학에 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는데도, 수능 하루를 위해 나라 전체가 멈춰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이 그렇게 많은데도, 여전히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을 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문 앞에서 엿을 나눠주는 학부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12년간의 학교생활이 이 하루에 걸려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니, 12년이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어떤 아이들은 영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4살 때부터 이 하루를 준비해 왔다.
수능은 한국 교육제도의 종착지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2년의 과정이 모두 이 하루를 향해 설계돼 있다. 학생들은 이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하고, 교사들은 이 시험을 잘 보도록 가르치고, 학부모들은 이 시험을 잘 보게 하려고 사교육비를 쏟아붓는다.
그리고 이 시험이 끝나면, 비로소 삶이 시작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2025년 11월 14일 오후 5시 45분, 종이 울렸다. 52만 명의 수험생이 연필을 내려놓았다. 12년을 준비한 시험이 끝났다. 이제 이들은 대학에 가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 아니, 그전에 묻고 싶다. 이들은 지난 12년 동안 정말 '배움'을 경험한 적이 있었을까?
학교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서당'이 있었다. 마을마다 선비가 아이들을 모아 천자문을 가르쳤다. 읽고, 쓰고, 외우게 했다. 사서삼경을 암송하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서당은 '입시 기관'이 아니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글을 익히는 정도였다.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글방에 다녔고, 농번기에는 서당 문을 닫기도 했다.
근대적 의미의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1910년대부터 조선총독부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를 세웠다. 표면적으로는 '교육의 근대화'였지만, 실제 목적은 달랐다.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하급 관리와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것.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식 규율을 심어 넣고, 산업 현장에 투입할 인력을 길러냈다.
이 구조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아니, 더 강화됐다.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1960년대 산업화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대한민국은 '교육'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삼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배워야 했고, 배우려면 학교에 가야 했고, 더 나은 일자리를 얻으려면 더 좋은 학교에 가야 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교육이 '배움' 그 자체가 아니라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된 것이다. 이런 교육 구조는 어디서 왔을까? 산업혁명 이후 서구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18세기 영국의 공장에는 다섯 살, 여섯 살 아이들이 하루 12시간씩 굴뚝을 청소하고 방적기를 돌렸다. 아동의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노동법이 생겼다.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법. 더 이상 어린아이를 공장에서 일하게 할 수 없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을 어디로 보내야 하나?
답은 '학교'였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었다. 미래의 산업 인력을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고, 지시를 따르고, 과제를 수행하고, 평가를 받는다. 이 과정은 공장 노동자가 갖춰야 할 기본 자질과 정확히 일치했다. 시간 엄수, 규율 준수, 지시 이행, 반복 작업.
현대 교육제도는 바로 이 목적으로 설계됐다. '산업 인력 양성'. 영국에서 시작된 이 모델은 산업화를 거친 국가들로 퍼져나갔다. 일본도 이를 받아들였고,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 해방 후 한국은 이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입시'라는 강력한 동기를 결합시켰다.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산업화는 '학력'에 명확한 가치를 부여했다. 공장에 취직하려면 중학교는 나와야 했고, 사무직이 되려면 고등학교를 나와야 했고, 관리직이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했다. 학력은 곧 임금이었고, 임금은 곧 계층이었다.
그러자 모두가 학교로 몰려들었다. 1970년 중학교 진학률은 61.4%였다. 1980년에는 95.8%로 뛰었다. 고등학교 진학률은 1970년 28.8%에서 1990년 88.9%로 치솟았다. 대학 진학률은 1980년 27.2%에서 2008년 83.8%까지 올랐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갈수록,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대학 입시는 교육의 유일한 목표가 됐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과정은 모두 '대입'을 향해 설계됐다. 내신 관리, 모의고사, 수능 준비. 교사는 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가르쳤고, 학생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고, 학부모는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돈을 썼다.
그리고 사교육 시장이 폭발했다.
1980년대 과외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은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학원가가 번성했고, 2000년대 인터넷 강의가 등장했고, 2010년대에는 일대일 과외와 컨설팅이 고가 상품이 됐다. 2023년 기준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7조 1천억 원. 학생 1인당 월평균 43만 5천 원을 사교육에 쓴다.
왜 이렇게까지 돈을 쏟아붓는가? 학교만으로는 대학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만으로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는 교과서를 가르치지만, 입시는 교과서 너머를 요구한다. 학교는 정규 수업만 하지만, 입시는 심화 과정을 요구한다. 학교는 모두를 같은 속도로 가르치지만, 입시는 앞서나간 학생을 선호한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학원으로 간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학원이 끝나면 독서실로,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중학생이, 초등학생이, 심지어 유치원생이 이 일정을 소화한다.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자지 않으면 꿈을 이룬다는 말이 관용구처럼 돌았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시작된 '암기 교육'은, 일제강점기 '산업 인력 양성 시스템'과 결합했고, 해방 이후 '계층 상승 사다리'가 됐고, 산업화 시대 '입시 경쟁 구조'로 완성됐다.
그리고 2025년 오늘, 우리는 여전히 이 시스템 안에 있다. 서당의 암기, 공장의 규율, 입시의 경쟁. 100년 넘게 누적된 이 구조는 이제 너무 견고해서, 누구도 쉽게 바꿀 수 없는 거대한 관성이 됐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길러낸 인재는, 정말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일까?
한국 교육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표현이 있다. '주입식 교육'. 교사가 지식을 주입하고, 학생은 그것을 암기한다. 이 말은 너무 익숙해서 이제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묘하다. 왜 '교육'이 '주입'이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게 됐을까?
주입(注入)은 액체나 기체를 강제로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의학 용어로는 '주사'에 가깝다. 학습자의 의지나 능동성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내용물을 밀어 넣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암기(暗記)는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내용을 외운다는 뜻이다.
주입하고 암기한다. 이것이 한국 교육의 핵심 메커니즘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시험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산업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설계됐다. 그리고 그 인력을 선별하고 배치하는 도구가 '시험'이었다. 공장에서 일할 사람,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 관리자가 될 사람을 가려내려면 명확한 기준이 필요했다. 시험은 그 기준을 제공했다.
하지만 수십만, 수백만 명을 평가하는 시험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채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택된 방식이 '5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이었다. 문제를 내고, 보기를 주고, 정답을 고르게 한다. OMR 카드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답을 표기하면, 기계가 자동으로 채점한다. 빠르고, 정확하고, 논란의 여지가 적다.
이 시스템은 효율적이었다. 1993년부터 시작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하루 만에 전국의 수십만 명을 평가하고, 며칠 만에 결과를 낸다. 이보다 더 효율적인 선발 시스템은 없다.
그런데 이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전제가 있다. '정답이 존재한다'는 전제다.
5지선다형 문제는 반드시 하나의 정답을 가져야 한다. 두 개의 답이 가능하거나, 해석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는 출제할 수 없다. 이의 제기가 들어오고, 문제가 무효 처리되고, 시험 전체의 신뢰도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제자는 '명확한 정답'이 있는 문제만 낸다.
그리고 학생은 그 정답을 찾는 훈련을 한다. 12년 동안.
국어 시험에서는 지문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묻는다. 하지만 작가의 실제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출제자가 정답으로 설정한 의도'다. 영어 시험에서는 빈칸에 들어갈 단어를 고른다. 하지만 문맥상 여러 단어가 가능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가장 적절한' 답을 골라야 한다. '가장 적절하다'는 건 출제자의 기준이다.
수학은 더 명확해 보인다. 수학은 논리의 학문이니까, 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학 교육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학생들은 '문제 푸는 법'을 배우지, '수학적 사고'를 배우지 않는다. 공식을 외우고, 유형을 익히고, 빠르게 계산하는 훈련을 한다. 왜 그 공식이 성립하는지,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험 시간 안에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 됐다. 연도를 외우고, 사건을 외우고, 인물을 외운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거나, 여러 관점을 비교하거나, 현재와 연결해 생각하는 일은 시험 범위가 아니다. 과학도 암기 과목이 됐다. 원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용어를 외우고, 공식을 외우고, 실험 결과를 외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시험이 '이해'를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해는 정도의 문제다. 깊이 이해한 사람도 있고, 얕게 이해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5지선다형 시험은 '맞다'와 '틀리다'만 구분한다. 그래서 이해 대신 암기를 측정한다. 암기는 명확하다.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 한국의 교육은 '암기력 = 학습력'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교사는 교과서 내용을 설명한다. 학생은 그것을 노트에 받아 적는다. 시험 전에는 교과서와 노트를 반복해서 읽으며 외운다. 시험을 보고, 채점을 받고, 점수를 확인한다. 틀린 문제는 '다시 외워야 할 내용'으로 분류된다. 이해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음 시험에서 맞히면 된다.
이 방식은 효율적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처리'할 수 있고, 학생 입장에서도 '외우면 점수가 나오는' 명확한 방식이다.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것보다 외우는 게 빠르고, 시험 범위가 정해져 있으니 그 범위 안에서 최대한 많이 외우면 된다.
학생들은 '공부=암기'라고 배운다. 공부를 잘한다는 건 많이 외운다는 뜻이다. 성적이 좋다는 건 암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명문대에 간 학생은 암기를 가장 잘한 학생이다.
이 시스템은 산업사회에서는 작동했다. 아니, 작동한 정도가 아니라 필수적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 현장을 떠올려보자. 공장에는 기계 매뉴얼이 있었다. 일본어나 영어로 된 두꺼운 설명서를 읽고, 이해하고, 숙지해야 했다. 사무실에는 공문서가 쏟아졌다. 정부 지침, 업무 규정, 회계 장부. 모두 한자 섞인 문어체로 작성돼 있었다. 이걸 빠르게 읽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즉시 실행해야 했다.
당시에는 '문헌 리터러시'가 곧 직무 능력이었다. 많이 외울수록,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일을 잘했다. 법조인은 수백 개의 법조문을 암기했고, 의사는 수천 개의 의학 용어를 외웠고, 기술자는 각종 규격과 수치를 머릿속에 담았다.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대. 필요한 정보를 즉시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전문가였다.
더 중요한 건 '표준화'였다. 산업화는 대량생산을 의미했고, 대량생산은 표준화를 요구했다. 같은 매뉴얼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같은 결과를 내야 했다. 창의적인 해석이나 개인적인 판단은 오히려 '오류'였다. 정해진 답을 정확하게 따르는 것이 미덕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려면 매뉴얼을 외워야 했고, 사무실에서 일하려면 업무 규정을 외워야 했고, 전문직이 되려면 방대한 지식을 외워야 했다. 암기력이 곧 경쟁력이었다.
암기 중심 교육은 이런 사회에 딱 맞는 인재를 길러냈다. 빠르게 습득하고, 정확하게 재현하고, 실수 없이 수행하는 인력. 한국의 고속 성장은 바로 이런 '고급 암기형 인력'이 뒷받침했다.
1960년대 문맹률 30%에 육박하던 나라가, 1970년대에는 중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대학 진학률이 급상승했다. 이 빠른 교육 확대는 '표준화된 지식 전달'로만 가능했다. 전국의 학교에서 같은 교과서를 쓰고,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같은 시험으로 평가했다. 암기와 주입은 단기간에 대량의 인력을 양성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1970년 1인당 GDP 279달러였던 나라가 2024년 3만 3천 달러를 넘어섰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됐다. 이 성장의 뒤에는 매뉴얼을 정확하게 읽고, 표준을 철저히 지키고, 반복 작업을 오류 없이 수행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1990년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2000년대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2020년대 AI가 상용화되면서, '아는 것'의 가치가 급락했다. 이제 모르는 건 5초 만에 검색하면 된다. 매뉴얼은 PDF 파일로 언제든 열어볼 수 있고, 법조문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면 되고, 의학 정보는 AI가 순식간에 정리해 준다.
암기력이 아니라, 검색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해졌다. 표준화된 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만들고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해졌다. 주어진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매뉴얼에 없는 상황에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
질문은 사라졌다. 학생들은 궁금해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주어진 내용을 받아들이고, 외우고, 시험을 보는 것이 '공부 잘하는 방법'이다. 왜 그런지 묻지 않고, 다르게 생각해 보지 않고, 스스로 탐구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없다. 시험 범위가 방대하고, 외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주입하고 암기한다. 이것이 100년 동안 작동한 한국 교육의 엔진이었다.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명확했다. 그리고 한때는 정말로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이 엔진은 한계에 도달했다.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시스템은, 정보화 시대를 거쳐 AI 시대로 접어든 지금,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아니, 작동은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너무 오래, 너무 잘 작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멈출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학생은 여전히 외우고, 교사는 여전히 주입하고, 학부모는 여전히 사교육비를 쏟아붓는다. 시스템은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청년들은 스펙은 쌓았지만 역량은 없는 상태로 사회에 나오고 있다.
2024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1.5%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10명 중 7명이 대학에 간다. 대학 졸업자는 이제 더 이상 '소수 엘리트'가 아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대학을 나온 사람은 늘었는데, 일자리는 줄었다.
2023년 기준 대졸 청년 실업률은 7.4%. 고졸 청년 실업률 6.8%보다 높다. 대학을 나왔는데 취업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호소하는데, 대졸 청년들은 대기업과 공기업 입사를 준비한다. 서로 원하는 게 다르다.
그래서 '고학력 백수'라는 말이 생겼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 이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이태백', '삼태백'. 이십 대에 백수, 삼십 대에 백수.
그러자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대학원 진학률 상승이다. 2023년 대학원 진학률은 8.9%. 2010년 6.0%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학부를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니, 석사를 하고, 석사를 해도 안 되니 박사를 한다. 학력 인플레이션이 시작됐다.
하지만 석·박사 학위도 취업을 보장하지 않는다. 2022년 박사 학위 취득자의 취업률은 66.3%. 10명 중 3명은 학위를 받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대학에는 시간강사 자리조차 줄어들고 있고, 기업은 석·박사보다 '실무 경험자'를 선호한다.
이상한 일이다. 더 많이 배웠는데, 더 오래 공부했는데, 일자리는 더 없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2024년 상반기 채용 시장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인사담당자들이 신입사원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시하는 건 '실무 역량'과 '소프트스킬'이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 문제해결력, 협업 능력. 면접에서 이런 역량을 확인하는 게 채용의 핵심이라는 응답이 두드러졌다. 전공 지식이나 학점 같은 계량화된 스펙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기업이 원하는 건 '아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동료와 소통하고, 함께 일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필요한 역량이었다.
그렇다면 취업준비생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같은 해 구직자 조사 결과를 보면, 60~70%가 여전히 '학점', '어학 점수', '자격증' 같은 계량화 가능한 스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무 경험이나 인턴 활동보다 토익 점수를 올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학점, 토익, 자격증. 모두 '점수'로 환산되는 것들이었다. 취준생들은 여전히 '점수 쌓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12년 동안 시험 점수로 평가받아온 사람들에게, 이것이 유일하게 익숙한 방식이었다.
기업이 원하는 것과 취준생이 준비한 것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있었다.
기업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요?"라고 묻는데, 취준생은 "제 학점은 4.3입니다"라고 답한다. 기업은 "팀 프로젝트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라고 묻는데, 취준생은 "토익 990점입니다"라고 답한다. 기업은 "실패한 경험과 그로부터 배운 점은?"이라고 묻는데, 취준생은 "자격증 7개 보유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취준생의 잘못이 아니다. 이들은 시스템이 요구한 대로 준비했을 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이들은 '점수 올리기'를 배웠다. 시험 점수, 내신 점수, 수능 점수. 점수가 높으면 좋은 대학에 갔고,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대학에 와서도 같은 방식을 반복했다. 학점 올리기, 토익 점수 올리기, 자격증 따기. 이력서에 쓸 수 있는 '점수'를 모으는 데 4년을 썼다.
그런데 막상 취업 시장에 나오니, 기업은 전혀 다른 것을 요구했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어떤 문제를 해결해 봤나요?", "협업해 본 경험이 있나요?"
12년 동안 누구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교사는 "이 문제의 답은 뭐죠?"라고만 물었다. 학생은 정답을 찾아 답란에 표기하는 법만 배웠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법을 스스로 찾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우는 경험은 '교육과정'에 없었다.
그래서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20대 청년이 학사 학위를 들고 있지만, 실무에서는 '신입'이 아니라 거의 '백지'에 가깝다. 기업은 이들을 뽑아서 다시 가르쳐야 한다. 대학이 길러낸 인재가 아니라, 기업이 처음부터 키워야 하는 인력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공채'를 줄이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대기업들은 수천 명씩 공개 채용을 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공채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대신 '경력직 채용', '수시 채용', '인턴 전환'이 늘었다. 대학 졸업장보다는 실무 경험을, 학점보다는 프로젝트 결과물을, 스펙보다는 실제 역량을 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학점과 토익에 매달린다. 왜? 그게 유일하게 아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12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대학도 그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시험을 보고, 학점을 매기고, 석차를 발표한다. 대학은 여전히 '고등학교의 연장선'이다.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2024년 10월, 30대 '쉬었음' 인구가 33만 4천 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쉬었음'은 취업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일자리를 찾다가 지쳐서, 아니면 애초에 찾을 일자리가 없어서, 아예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직을 포기하지 않은 청년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6개월 이상 일자리를 찾아도 취업하지 못한 장기 실업자가 11만 9천 명. 4년 만에 최다다. 이 중 4년제 대학 졸업 이상 학력을 가진 20~30대가 3만 5천 명이다.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반년 넘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전체 실업자 중 장기 실업자 비율은 18.1%. 외환위기 때보다 높다.
대학을 나왔는데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다. 원하는 일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6개월, 1년을 찾아도 일자리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주력 산업인 제조업은 16개월째 취업자가 감소했고, 건설업은 18개월 연속 감소세다. 반도체 수출이 역대 최대를 달성했지만, 고용은 늘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제조업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다. 산업은 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
그리고 이제 인공지능이 확산되고 있다. 제조업뿐 아니라 사무직, 서비스직까지 AI가 들어오고 있다. 30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이 시스템을 만든 건 아이들이 아니다. 청년들도 아니다. 이들은 단지 시스템이 요구한 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좋은 학점을 받고, 스펙을 쌓고, 이력서를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20대를 바쳤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오니, "당신이 준비한 건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라는 말을 듣는다.
이들은 피해자다. 100년 동안 누적된 시스템의 피해자. 산업사회가 설계한 교육 구조, 암기와 주입으로 점철된 12년, 점수와 등수로만 평가받은 학창 시절의 피해자. 이들은 '산업 인력 양성'을 목표로 설계된 교육 시스템을 거쳐 배출됐지만, 정작 산업은 이미 암기와 정답이 필요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제, 이들 앞에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암기력에서는 인간을 압도하고, 정답 찾기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존재. 인공지능이다.
2024년 가을, 한국의 주요 대학가가 술렁였다.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잇따라 'AI 커닝' 사태가 터졌다. 학생들이 과제와 시험에서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한 것이다.
리포트에서 AI가 작성한 문장이 발견됐고, 온라인 시험에서 AI의 답변이 그대로 제출됐다. 교수들은 당황했고, 대학은 즉각 대책을 내놨다.
"AI 사용 적발 시 F학점 처리", "AI 표절 검증 시스템 도입", "손글씨 시험 확대".
언론은 이를 "학문적 부정행위"로 보도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이들은 12년 동안 '정답 찾기'를 훈련받았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정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공부였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인간보다 훨씬 잘하는 도구가 생겼다. ChatGPT에게 질문을 던지면, 몇 초 만에 답이 나온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 전국의 학교가 문을 닫았고,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코로나 학번'이라 불리는 세대가 생겼다. 이들은 교실이 아니라 화면 앞에서 수업을 들었다. 교사의 얼굴은 모니터 속에 있었고, 친구들은 채팅창에 있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곧 적응했다. 오히려 편한 점도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되감기 해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수업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궁금한 내용은 수업 중에 검색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23년, ChatGPT가 등장했다. 이들은 주저 없이 AI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수학 문제 풀이 방법 알려줘."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설명해 줘." "이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번역해 줘."
AI는 즉시 답했다. 교사에게 질문하면 "수업 끝나고 물어봐"라고 했지만, AI는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교과서에 없는 질문도 AI는 답해줬다. 학원 강사보다 설명이 더 잘 이해됐다.
이들에게 AI는 '커닝 도구'가 아니라 '학습 도구'였다. 교사가 아니라 AI에게 배우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대학은 이들에게 "AI를 쓰지 마라"라고 말한다.
계산기가 나왔을 때를 떠올려보자. 처음에는 "계산기를 쓰면 암산 능력이 퇴화한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계산기 사용을 문제 삼지 않는다. 복잡한 계산은 계산기에 맡기고, 인간은 '어떤 계산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인터넷 검색도 마찬가지였다. "검색만 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르면 검색하면 되지"가 상식이다.
그렇다면 AI는 규제의 대상인가?
자동차 시대가 열렸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세기 영국에는 '적기조례'라는 법이 있었다. 증기자동차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걸어가야 했고, 속도는 시속 6.4km로 제한됐다. 마차 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결과는? 이 법은 영국의 자동차 기술 발전을 수십 년간 지연시켰다. 적기조례로 영국이 뒤처지는 동안, 독일과 미국은 빠르게 자동차 기술을 발전시켰다.
대학의 AI 금지는 21세기 판 적기조례가 되는 게 아닐까?
학생들이 곧 들어갈 직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2024년 7월 인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인사담당자의 56.2%는 AI 활용 능력을 채용 시 '스펙'으로 본다. 같은 해 11월 한국표준협회 조사에서는 국내 직장인의 87.4%가 이미 업무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은 "AI를 쓰면 F학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직장은 "AI를 못 쓰면 채용 안 한다"라고 말한다. 교실과 직장 사이에 거대한 단절이 생겼다. 그리고 가장 아이러니한 건, 기업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AI 활용 교육'이라는 점이다. 기업 인사담당자의 78.8%가 'AI 시대 HR의 핵심 역할'로 '직원 교육·훈련'을 꼽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AI를 활용할 줄 아는 직원'이 아니라, 'AI를 학습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교육을 담당해야 할 대학은 여전히 AI를 학습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학생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교육은 '주입'과 '암기'를 중심으로 작동했다. 교사는 지식을 주입했고, 학생은 그것을 암기했다. 시험은 얼마나 많이 암기했는지 측정하는 도구였다. 이 시스템은 산업사회에서 필요한 인력을 효율적으로 길러냈다.
하지만 이제 '주입식 교수력'의 끝판왕이 나타났다. AI는 교과서 내용을 완벽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암기식 학습력'의 끝판왕도 나타났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검색하고 조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AI는 산업 발전의 결과물이다. 인간이 쌓아 올린 지식과 기술의 집약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목표로 했던 '산업 인력 양성'의 최종 단계에서, 그 산업이 만들어낸 AI가 교육 시스템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고 있다.
시험이 '정답 찾기'를 측정하는 한, AI는 항상 이긴다. 과제가 '정보 정리하기'를 요구하는 한, AI는 더 잘한다. 교육이 '주입과 암기'에 머무르는 한, AI가 더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건 의미가 없다. AI가 못하는 일을 찾아서 그것만 가르치자는 건, 결국 AI가 발전할 때마다 교육 내용을 계속 줄여나가겠다는 뜻이다. 그건 후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어진 문제에 정해진 답을 내놓는 일은 AI의 몫이다. 문제를 발견하고 질문을 만들고 해법을 찾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전자는 암기력의 영역이고, 후자는 창의력의 영역이다.
12년 동안 학생들은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한 번도 '질문을 만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정답을 찾는 훈련은 받았지만, 문제를 정의하는 경험은 없었다. 지식을 암기하라고 배웠지만, 지식을 의심하라고 배우지 못했다. 두뇌에 정답을 입력하고, 시험지에 출력하는 일. 12년을 그렇게 보냈다. 이 과정에서 창의력이 생길 수 있을까?
2025년 지금, 한국의 교실은 여전히 시험 중이다. 학생들은 여전히 5지선다형 문제를 풀고 있다. 교사들은 여전히 교과서를 설명하고 있고, 대학들은 여전히 학점을 매기고 있다.
정답의 시대는 끝났는데, 교실은 여전히 정답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바뀌어야 할 것은 학생이 아니라, 여전히 정답만 채점하는 그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