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결핍의 추적기 : "다 너 잘되라고" 끝에 남은 것들
고립의 숫자
78만 7,000명. 취업 의사도, 구직 활동 계획도 없이 그냥 쉬고 있는 청년들의 숫자다. 물론 그 78만 7,000명이 모두 같은 이유로 멈춰 선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도 있고, 팬데믹의 상흔도 있고, 구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소득과 주거 기반이 함께 무너지는 악순환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요인의 안쪽에, 좀처럼 꺼내기 불편한 언어가 하나 있다. "다 너 잘되라고"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꾸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쉬었음 인구가 늘어나고 있어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준비해야 한다"라고 짚었다. 중장년 히키코모리와 '8050(80대 부모가 50대 자녀를 부양하는 문제)'이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은 풍경은, 자립이 늦어진 시간이 고령화와 포개질 때 어떤 후일담이 가능해지는지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경험 대행’
이 고립의 뿌리를 '의지박약'이라는 납작한 말로 단정하는 것은 쉽고도 위험하다. 비극은 가장 따뜻해야 할 곳에서, 가장 선한 의도들이 얽히며 시작된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문법이 어느 순간부터 '대행'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갈등을 대신 처리하고, 실패를 대신 막아주고, 장애물을 미리 치워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스스로 단단해질 기회를 잃는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조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무너진 관계를 스스로 복구해 본 경험 없이, 헨리크 입센의 희곡 속 노라처럼 문 앞에서 시간만 흘려보내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괴물 부모' 같은 자극적인 단어로 이 현상을 가둬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가해자로 적시하는 순간 문제는 개인의 성격 파탄으로 치부되고, 그 뒤에 숨은 거대한 구조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경험 대행'은 특정 개인의 유별난 품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숨 막히는 경쟁,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공포와 불안의 만성화가 부모의 사랑을 자녀를 위한 가장 처절한 생존 전략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민원에 밀린 교실
도를 넘는 개입이 교육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오면서 학교의 표정은 조금씩 달라졌다. 서이초 사건 이후 우리가 목격한 장면들은 그 변화를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 교사의 전문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저마다의 상식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말들, 아이의 불편을 조정과 성장의 문제라기보다, 당장 바로잡고 누군가의 책임을 따질 문제로 몰아가는 방식들.
여기서 핵심은 몇몇 학부모의 유별난 성미를 지적하는 일이 아니다. 조정되어야 할 갈등이 제대로 걸러지지 못한 채 담임교사 개인의 노동과 감정으로 흘러 들어오는 구조, 바로 그 구조가 반복되면서 '관계의 피로'가 쌓인다.
그 피로가 길어질수록 교실 안의 풍경도 바뀐다. 생활지도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질수록, 교사는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가능한 한 개입을 줄이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아이들이 복도에서 뛰고, 친구를 밀치고, 수업의 흐름을 흔드는 일이 있어도 예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말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되면 교사의 권위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사과하고, 다시 관계를 복구하는 과정을 함께 배워야 할 교실 전체의 질서가 조금씩 약해진다.
그 사이 아이들이 교실에서 배우는 '숨은 커리큘럼'도 조금씩 달라진다. 갈등을 직면하고 조정하는 마음의 근육을 기르는 대신, 불편이 생기면 누가 대신 해결해 주는가를 먼저 목격하게 된다. 공동체의 규칙을 몸으로 익혀야 할 시기에, 관계의 기술보다 민원이 더 빨리 먹힌다는 감각이 먼저 자리 잡는 셈이다.
이런 흐름은 누군가의 탓이라기보다, 교육 공동체가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조정과 훈육보다 회피와 최소 개입 쪽으로 기울었다는 신호에 가깝다. 그럴수록 교실은 공동체의 규칙과 절제를 함께 익히는 공간이라기보다, 서로에게 피곤한 분쟁을 최소화하는 장소로 바뀌어간다.
회사에 걸려오는 부모의 전화
장면은 학교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때 교실 문턱을 넘나들던 ‘대행의 언어’는 이제 일터에까지 스며든다. 한 언론사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인사 담당자의 35%가 신입 사원의 가족에게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직장이 더 이상 독립된 사회인들의 공동체로만 작동하지 않고, 사적인 불안과 보호의 언어가 침투하는 공간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부모의 걱정 그 자체가 아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당사자가 감당하고 조율해야 할 과정이, 어느 순간 본인이 아닌 주변인의 항의와 개입으로 대체되는 모양새다. 업무 지시를 둘러싼 불만이 당사자 간 대화와 조율을 거치기보다 퇴근 후 부모의 전화나 부모의 회사 방문으로 이어질 때, 일터의 균형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직장이 성인들끼리 서로 책임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아이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 번지는 그 구도가 일터에서 재연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회사가 치르는 비용도 커진다. 상사와 신입 사이의 어색함, 업무를 배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편, 책임을 나누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긴장까지 모두 ‘즉시 제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여지면, 직장은 인재를 키워내는 곳이 아니라, 갈등을 피하는 데 급급한 곳으로 기울게 된다.
학교에서 충분히 익히지 못한 '관계의 기술'은 기업에게 다시 가르치는 시간과 비용을 요구한다. 그 부담이 커질수록 기업은 신입보다 즉시 쓸 수 있는 경력직을 찾게 된다. 2010년대 후반 들어 '공채 시즌'이라는 표현은 사라졌고, 지금은 대부분의 기업이 '경력직 같은 신입'을 수시로 채용한다.
"다 너 잘되라고"의 두 얼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집에서는 부모의 언어로, 일터에서는 상사의 문법으로 반복되는 말이다. 같은 문장이지만 한쪽에서는 사랑의 외피를 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권위의 가면을 쓴다.
그러나 의도의 선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집에서는 불편과 실패를 대신 막아주고, 일터에서는 충돌과 긴장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처리한다. 보호든 지시든, 당사자가 스스로 겪어내고 극복해 낼 기회를 지워버리는 방식은 같다. 수능 점수는 쌓였지만 사람 공부는 빠진 채로 사회에 나온 청년이 직장에서 또 한 번 기회를 박탈당하는 꼴이다.
직장인의 퇴사 사유 상위권에 늘 대인관계의 피로가 오르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사람 사이에서 버텨내야 하는 감정 소모가 커질수록 신뢰는 줄어든다. 대인관계의 피로가 임금과 처우의 장점마저 덮어버리는 현실 앞에서, 더 많은 기업들이 채용에 앞서 ‘컬처핏’과 ‘협업 능력’을 따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직무 역량과 스펙보다 구성원 사이에 신뢰 관계가 먼저 흔들리고, 그 균열이 성과라는 탑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적응 실패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한 세대와 소통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조직의 경직성,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회피하거나 곧바로 판정해 버리는 문화가 겹치면서, 우리 사회는 관계의 문제로 서서히 골병이 들어가고 있다.
감수성이 확장되는 시대, 괴롭힘과 폭력을 더 잘 알아보고 멈춰 세우려는 감각은 분명한 진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우려하는 사회적 위험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꼽은 응답이 남녀 모두 1위였다. 사회관계 단절과 과도한 경쟁이 그 뒤를 이었다.
여기에 한 청년 심리정서지원 플랫폼이 2025년 상담 데이터 500여 건을 분석한 결과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청년들이 가장 많이 토로한 고민은 진로·취업보다 대인관계였고, 더 깊은 상담으로 들어가면 정신건강 문제가 핵심으로 떠올랐다. 청년의 불안은 일자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관계와 정서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다만 마주해야 할 모든 불편을 괴롭힘으로 못 박고 상대를 가해자로 규정하는 방식이 오남용 될 때, 조직은 사분오열될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날 선 정의의 심판이 아니라, 불편한 갈등조차 풀어낼 수 있는 유연한 조직 문화다.
그런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한 곳에서, 청년의 이탈과 조직의 고령화는 맞물려 돌아간다.
고립의 시간, 남겨진 대가
최근의 조사들은 세대 갈등의 심각성을 경고하지만, 숫자 뒤에 숨어 있는 더 불길한 징후는 따로 있다. 곤경에 처했을 때 기댈 사람이 없다는 감각은 불안을 키운다. OECD 조사에서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있다'라고 답한 비율이 회원국 가운데 하위권인 나라에서, 그 감각은 결코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다. 함께 버티고 의지할 사람이 드문 사회에서 갈등은 풀리기보다 쌓이고, 사람들은 서로를 함께 사는 이웃이 아니라 피해야 할 부담으로 여기기 쉬워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교사는 학부모의 민원을, 선배는 신입과의 마찰을, 회사는 가족의 개입을 괜히 얽히고 싶지 않은 골칫거리로 여기게 된다. 공동체는 이제 믿고 의지하며 함께 나아가는 '한 배'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경계하고 회피하는 기술만 익힌 채, 누구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분석은 한 번 '쉬었음' 상태에 들어간 청년들이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흔 효과를 보여준다. 특히 관계의 감각을 몸으로 익혀야 할 시기를 팬데믹 속에서 건너온 세대일수록 그 흔적은 더 깊다.
학교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훈련이 약해지고, 일터에서 관계의 피로가 커지고, 곁에 기댈 사람마저 드문 환경이 겹칠 때, 자립은 더 이상 개인의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쉬었음'의 장기화는 게으름의 결과라기보다, 사람과 부딪치며 단단해질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사회가 치르고 있는 대가에 가깝다.
“다 너 잘되라고”라는 말이 집에서는 사랑의 언어로, 일터에서는 권위의 문법으로 쓰이는 동안, 정작 그 말을 들어온 세대는 사람과 부딪치고 조정하고 버텨내는 관계의 기술을 충분히 익힐 시간을 갖지 못했다. 청년 세대 78만 7,000명이라는 숫자는 그 빼앗긴 시간이 보내온 청구서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