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음 청년의 71%가 직장 생활 경험자였다

수능에는 진심인 나라가 청년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

by 우드코디BJ

청년이 힘들다고 하면 늘 비슷한 처방이 돌아온다. 지원금을 더 두텁게 해야 한다, 공공부문이 더 뽑아야 한다, 대기업이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말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처방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질문이 있다. 청년은 왜 일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왜 들어간 뒤에도 다시 나오느냐는 질문이다.


올해 2월 25~29세 취업자는 9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같은 달 30대 고용률은 올랐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현상의 앞뒤일 수 있다. 신입 채용은 줄고 경력직 선호는 강해지면서 20대는 조직 진입 자체가 더 어려워졌다. 가까스로 들어가더라도 적응에 실패해 밀려나는 경우가 생긴다. 그 빈자리는 조직의 리듬을 이미 한 차례 이상 익힌 30대가 메우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숫자는 엇갈려 보이지만, 입구가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좁아진 입구를 통과하지 못했거나, 통과했다가 다시 나온 청년들은 ‘쉬었음’ 인구로 이동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가운데 다수가 직장 경험이 있는 청년이라는 점이다.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들어가 봤다가 나온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가 가장 크게 나타나지만, 우울감과 정서적 소진을 호소하는 비율 역시 높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감정의 소진, 곧 번아웃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원하는 자리를 찾지 못한 좌절과 관계 속에서 누적된 감정의 소진이 함께 청년을 ‘쉬었음’으로 몰아내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언론과 온라인에는 곧잘 세대 괴담이 번진다. 사소한 지시에 이유를 따지고, 피드백에 상처받고, 야근과 회식을 거부하는 신입의 이야기가 특정 세대의 결함을 입증하는 사례처럼 소비된다. 그러나 이 프레임은 출발부터 어긋나 있다. 신입을 직접 상대하는 중간관리자들 역시 깊은 피로와 번아웃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쪽이 서로를 힘들어하는 현실은 어느 한 세대의 약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전에 통하던 조직의 규칙은 힘을 잃었는데,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규칙은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사람만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Gemini_Generated_Image_37vzi537vzi537vz.png 관계가 흔들릴 때를 위한 매뉴얼은 아직 없다.


물론 모든 쉬었음 청년의 문제를 관계 조율 역량의 부족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컬처핏이라는 이름으로 청년을 선별하면서도 정작 조직문화 자체는 돌아보지 않는 기업도 적지 않다.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 신고가 계속 늘어나는 현실은, 조직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관계를 조율하는 역량은 청년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기업과 조직 스스로도 함께 점검해야 할 문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 축의 질문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왜 많은 청년이 조직 안에서 사람과 부딪히는 순간 쉽게 소진되고, 관계의 긴장을 견디지 못한 채 바깥으로 밀려나는가 하는 질문이다.


조직은 신입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업무 프로세스를 가르치고, 보고 방식을 가르치고, 고객을 대하는 법을 가르친다. 성과 기준과 실무 감각도 익히게 한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더 자주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상사의 지시가 앞뒤가 맞지 않을 때, 동료와의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을 때, 첫 실수를 수습해야 할 때, 애매한 피드백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아야 할 때다. 시스템이 멈추면 매뉴얼이 있지만, 관계가 흔들릴 때를 위한 매뉴얼은 없다. 조직은 그 순간을 대개 개인의 성숙도에 맡겨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는 법이 아니다. 붙임성이 좋고 싹싹한 사람을 만드는 법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의범절이나 성품과 무관한 문제라는 뜻도 아니다. 과실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태도, 실수를 수습하는 책임감, 모호한 지시 앞에서 질문할 수 있는 용기, 피드백을 받아도 자기 자신 전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무너지지 않는 감각, 그리고 반복되는 문제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정할 수 있는 자기 객관화의 능력까지 함께 묶인 문제다. 직장인들이 흔히 “멘탈이 나갔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 그 흔들림을 견디고 다시 관계를 이어가는 힘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프트 스킬이라 뭉뚱그려 부르는 것의 실체도 결국 여기에 있다.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길러지는 감각, 사람과 부딪히며 축적되는 역량, 곧 관계를 조율하는 역량이다.


이 역량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은 채 실전에 던져진 청년은 조직 안의 관계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반대로 이직과 갈등, 실패와 복원을 거치며 그런 감각을 몸으로 익힌 30대는 경력직을 선호하는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20대와 30대의 고용 지표가 엇갈리는 배경에는 인구 감소와 채용 구조 변화만이 아니라, 조직 적응 경험이 축적되는 방식의 차이도 함께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충분히 묻지 않은 질문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결핍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어느 한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성세대 역시 학교에서 관계 조율 역량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교육과정 안에서 체계적으로 다뤄진 적도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학교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전 세대가 그나마 조직과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만이 아니라 학교 밖 삶의 구조 전체가 사회화를 함께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뒤섞인 골목에서 아이들은 지는 법을 배웠고, 시비가 붙었다가도 다음 날 다시 같은 아이와 어울리는 법을 익혔다. 친인척과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는 불편한 공기를 견디는 법과 관계를 조정하는 법을 몸으로 배웠다. 학교 역시 일정한 몫을 했지만, 적어도 사회화의 무게중심은 교실 바깥에도 넓게 퍼져 있었다.


그 구조가 무너졌다. 도시화는 골목을 지웠고, 핵가족화는 나이 섞인 집단을 해체했으며, 스마트폰은 아이들을 각자의 화면 속으로 흩어놓았다. 디지털 전환이 가팔라지면서 온라인은 오프라인과 나란한 또 하나의 사회가 됐고, 아이들은 현실의 갈등을 오래 견디기보다 화면 너머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갖게 됐다. 여기에 교육열이 선을 넘어서며 학교의 시간표마저 입시 중심으로 재편됐고, 하교 뒤의 시간은 학원과 과외가 잠식했다. 학교 안팎에서 사람과 부딪히고 관계를 조정하며 사회화를 익히던 시간과 공간이 함께 줄어든 것이다. 교육 예산은 늘고 교수법은 정교해졌지만, 한 번의 시험에 국가 행정력이 총동원되는 나라에서 갈등을 겪고 감정을 조절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배우는 경험은 끝내 주변부로 밀려났다.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과거보다 더 세련된 교육 시스템 속에서 훨씬 더 긴 학창기를 거치게 하고 있지만, 정작 사람과 부딪히고 관계를 조정하는 감각은 점점 더 비워둔 채 사회로 내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Gemini_Generated_Image_ax00mdax00mdax00.png 골목이 사라진 자리를 화면이 채웠다.


거기에 양육 방식의 변화가 겹쳤다. 삶의 구조가 사라진 자리를 학교가 메우지 못한 데다, 가정은 점점 더 아이를 위험과 좌절로부터 먼저 떼어놓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관계 조율 역량을 익힐 기회는 바깥에서 한 번 비워지고, 안에서 다시 한번 완충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늘의 청년 세대가 감당해야 할 결핍은 이전보다 더 구조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출산율이 떨어질수록 아이 한 명에게 보호가 집중되는 경향은 강해졌다. 헬리콥터처럼 아이 주변을 맴돌며 위험을 제거해 주는 부모가 늘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몇몇 부모의 과잉 애정이나 성격 탓만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자녀를 키우는 80년대생 부모 상당수는 10대에 IMF를 겪었다. 부모 세대의 고통을 사춘기에 목격한 이들은 경제적 불안을 몸으로 기억한다.


여기에 입시 경쟁은 더 일찍, 더 깊게 부모를 자녀 삶 안으로 끌어들였다. 부모가 개입하지 않으면 아이가 뒤처질 수 있다는 압박이 커졌다. 골목이 사라지며 아이를 혼자 내보내기 어려워진 도시 환경도 겹쳤다. 여기에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세대적 기억까지 포개지면서 보호는 더 촘촘해지고 더 이른 시기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헬리콥터 양육은 단지 선택이라기보다, 불안한 시대가 만들어낸 적응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 보호가 남긴 결과였다. 아이들은 적절한 좌절을 면역처럼 경험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채 자랐다. 실패해도 부모가 해결해 줬고, 불편하면 피할 수 있었고, 관계가 틀어지면 연결을 끊는 쪽이 더 쉬웠다. 보호는 두터워졌지만, 갈등을 겪고 감정을 조절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연습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헬리콥터는 이제 직장 상공까지 날아오고 있다. 부모가 채용 과정에 개입하고, 면접에 동행하고, 입사 후 관리자와 직접 접촉하는 사례는 좌절을 제거하는 구조가 성인기 이후까지 연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사실 오래전부터 이 징후를 감지해 왔다. 1990년대 초 유행가 제목으로까지 쓰였던 ‘마마보이’, 외환위기 직후 대학가에서 퍼졌던 ‘캥거루족’은 그 흔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구조의 산물로 보기보다, 대개 개인의 미성숙이나 성격 문제로 낙인찍는 데 그쳤다. 좌절 없이 자란 아이가 직장에서만 멈추는 것은 아니다. 사춘기와 20대를 지나며 갈등을 수습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경험을 충분히 쌓지 못하면, 그 미해결의 몫은 결국 다음에 맺는 인간관계로 넘어간다.


이 질문을 제대로 던지지 않은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영국은 학교도 직업훈련도 노동시장도 아닌 어딘가에 머무는 청년을 니트라 불렀고, 중남미와 남유럽에서는 같은 처지의 청년을 니니라 불렀다. 일본은 방 안에 틀어박히는 청년을 히키코모리라 했고, 욕망을 내려놓은 채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세대를 사토리 세대라 불렀다. 이탈리아는 부모 품을 떠나지 못하는 20~30대를 밤보초니라 불렀고, 중국에서는 탕핑족이라는 말이 시대의 표정이 됐다. 한국의 N포 세대 역시 연애와 결혼을 넘어 집, 인간관계, 꿈의 포기로까지 그 뜻이 확장돼왔다. 이름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킨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호 속에서 자랐지만 갈등을 겪고 관계를 회복하는 힘을 충분히 연습하지 못한 채, 그것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사회 앞에서 멈춰 선 세대라는 점에서다. 어떤 이는 방 안으로 숨었고, 어떤 이는 욕망을 접었고, 어떤 이는 드러누웠다. 형태는 달라도 이것을 단순한 나태로만 부를 수는 없다. 어느 사회도 그들에게 관계 조율 역량을 체계적으로 길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름을 달리한 채 반복해서 드러난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청년 정책은 대체로 일자리의 수를 늘리는 데 집중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만이 아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 관계를 맺고, 실패를 겪고, 다시 시도하고, 조직의 리듬에 적응하는 힘을 어디서 연습할 수 있느냐가 더 본질적이다. 우리는 청년에게 그 힘을 요구해 왔지만, 정작 그것을 상처받지 않고 반복해서 익힐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그 공백은 개인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와의 연결이 끊긴 고립·은둔 청년 문제는 이미 적지 않은 사회경제적 비용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쉬었음이 고립과 은둔으로 깊어질수록, 개인의 이력 단절은 곧 사회 전체의 손실이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지원금의 증액이나 단기 일자리의 확대만이 아니다. 사람과 부딪히고, 실패를 겪고, 다시 관계를 이어 보는 과정을 비교적 안전하게 반복할 수 있는 연습의 무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게임산업을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낯선 연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한 팀을 이뤄 강한 적을 공략하는 게임을 떠올려보면, 왜 이 매체가 중요한 후보가 될 수 있는지 금세 드러난다. 열 번을 실패한 팀은 열한 번째 시도에 들어가기 전, 누가 어느 순간 판단을 놓쳤는지 되짚고, 역할을 다시 나누고, 순서를 바꾸고, 다시 도전한다. 이 장면은 직장에서 프로젝트가 틀어진 뒤 팀이 다시 회의를 여는 장면과 닮아 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게임은 실패해도 팀이 곧바로 해체되지 않는 환경에서 이 과정을 수십 번이고 반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 반복이 중요하다. 학교도, 가정도, 조직도 끝내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 것은 갈등과 실패를 견디며 관계를 복원하는 훈련이었다. 한때 오락실 게임이 순발력과 개인 기량을 겨루는 데 강했다면, 오늘날의 협동·시뮬레이션 게임은 실패 뒤의 피드백과 역할 조정, 재도전의 구조를 훨씬 더 깊이 구현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그 가능성이 주로 과금과 경쟁, 개인 성취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사용돼왔다는 데 있다. 게임이 아직 본격적으로 설계하지 않은 영역이 하나 있다. 사람과 부딪히고 흔들리며 다시 조율하고 회복하는 힘을, 재미의 구조 안에서 반복해 익히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발상이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다. 군사 분야에서는 19세기 프로이센의 크리그슈필부터 오늘날의 합동훈련까지, 반복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판단력과 협업 능력을 기르는 방식을 오래전부터 제도화해 왔다. 이후 의료와 항공, 기업 교육 역시 비슷한 구조를 차용해 왔다. 게임이 진지한 훈련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검증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왜 우리는 그 매체를 사람 사이의 갈등과 회복, 적응과 협업을 연습하는 데는 아직 거의 써보지 않았는가.


물론 이것은 교훈을 주입하는 기능성 게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의 중독성을 모르는 척하자는 말도 아니고, 모든 청년이 게임을 통해 관계 조율 역량을 기를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아니다. 재미를 잃는 순간 이용자는 떠난다. 역량 개발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류 시간과 과금만 극대화하려 든다면 신뢰는 더 빨리 무너질 것이다. 필요한 것은 협업, 갈등 조정, 피드백, 회복, 적응이 재미의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되도록 만드는 설계다. 사람과 관계 맺고 조정하는 감각을 훈계가 아니라 경험으로, 강요가 아니라 몰입 속에서 축적되게 하는 방식 말이다.


바로 그 점에서 지금의 게임산업도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게임은 오랫동안 이용자의 시간과 몰입을 가장 치밀하게 설계해 온 산업이지만, 그 시간이 끝난 뒤 무엇이 남는지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했다. 경쟁과 보상, 과금과 체류의 구조는 점점 더 치밀해졌지만, 그 시간 끝에 남는 것이 과금의 부담과 피로, 그리고 공허뿐이라면 이용자는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용률 하락과 과금 피로는 이미 산업의 경고음이 되고 있다. 이탈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게임이 이용자에게 “이 시간은 내 삶에 무엇을 남겼는가”라는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가볍게 보기 어렵다.


그래서 쉬었음 청년 문제와 게임산업의 성장 둔화는 전혀 다른 위기처럼 보여도, 어쩌면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청년이 관계 조율 역량을 연습할 공간을 잃어버린 채 조직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게임이 이용자의 시간을 오래 붙잡으면서도 그 시간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지 못해 외면받고 있다. 만약 게임이 사회 진입에 필요한 갈등 조정, 협업, 피드백 수용, 회복과 적응의 경험을 재미의 구조 안에서 반복하게 만드는 플랫폼으로 다시 설계된다면, 두 위기는 처음으로 같은 방향의 출구를 가리키게 된다.


Gemini_Generated_Image_47lp8g47lp8g47lp.png 게임은 실패와 조율을 반복 연습하게 하는 드문 공간이다.


이 실험을 가장 먼저 떠올려볼 수 있는 나라도 어쩌면 한국이다. 한국은 청년 소외와 조직 부적응의 문제가 날카롭게 드러난 사회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높은 게임 리터러시와 집단적 이용 문화를 축적해 온 나라다. 별도의 고가 장비 없이도 누구나 고사양 환경에 접속할 수 있었던 PC방 문화는 단순한 소비 공간을 넘어, 게임이 공동의 경험이 되는 인프라를 오랫동안 제공해 왔다. 지금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해도, 이런 집단적 기반을 전국적으로 보유한 국는 여전히 드물다. 다른 나라에서는 비용과 접근성의 장벽 앞에서 멈출 발상이, 한국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사회적 상상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


쉬었음 세대에게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의지나 근성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학교도, 가정도, 조직도. 어디에도 갈등을 겪고 회복을 연습할 무대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단순히 몇 개의 일자리를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경험을 어디서 어떻게 축적하게 할 것인가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 청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지원금의 액수보다, 실패해도 곧바로 탈락하지 않고 관계가 흔들려도 다시 조정해 볼 수 있는 연습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게임은 우리가 아직 충분히 진지하게 상상해보지 않았을 뿐, 그 무대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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