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보세’를 부르던 마음은 어디로 갔나

피땀으로 일어난 나라는 대체 언제부터 빚투에 빠지게 됐을까

by 우드코디BJ

중동의 전운이 짙어질 때마다 한국 경제는 오래된 취약성부터 드러낸다. 기름값이 오르고, 원화가 흔들리고, 성장률 전망치는 낮아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월 중간 경제전망에서 한국의 2026년 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1.7%로 낮췄다. 중동발 에너지 충격이 성장에는 하방 압력, 물가에는 상방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내놓았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한국 경제가 여전히 이런 충격 앞에서 먼저 움츠러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Copilot_20260409_124250.png 1950년대 전후의 폐허가 된 국토가 한국 경제의 출발선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한국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출발했다. 자원은 빈약했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곤 사람뿐인 나라의 살 길은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 밖으로 파는 것뿐이었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수출과 제조업이 국가 생존의 문법이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잘 살아보세”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 맺힌 염원에 가까웠다.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그렇게 막 농경사회에서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던 한국을 정면으로 때린 것이 1970년대의 1차 오일쇼크였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원유 가격이 폭등한다는 것은 단지 원유의 수입 단가만 오르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원유는 연료이면서 동시에 원료이자 원자재였기 때문이다. 공장과 운송이 흔들리고, 난방과 부엌이 흔들리고, 학교와 장바구니가 한꺼번에 흔들렸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는 네온사인의 70% 이상이 꺼졌고, 석유를 구하지 못해 연탄난로를 다시 들여놓은 집들도 많았다. 석유통을 들고 주유소마다 줄을 서던 풍경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부와 사회 전체가 절전과 절약의 언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절 한국은 위기가 오면 먼저 생활비부터 줄이던 사회였다. 석유류 가격이 오르자 전력요금과 사료값, 비료값, 식료품 가격이 줄줄이 치솟았다. 기름값이 오른다는 말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단순한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겨울의 추위, 버스요금, 학교 방학, 시장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삶의 문제였다.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표현은 그 당시 비유가 아니라 생활 풍경 그 자체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누군가는 난방을 줄였고, 누군가는 소비를 미뤘고, 또 누군가는 외화를 벌기 위해 가족 곁을 떠났다. 오일쇼크 뒤 한국 경제를 떠받친 것은 정책 문서만이 아니었다. 집안의 살림과 나라의 외화난이 함께 조여오던 시절, 수많은 가장들이 사막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중동 건설 붐은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활로였고, 개별 가정 차원에서는 긴 부재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한국은 그렇게 벌이만 된다면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고생판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피땀 흘려 일하며 살아남았다.


Copilot_20260409_124244.png 1960~70년대 청계천변 판잣집은 가난한 시대의 궁핍한 삶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나 1차 오일쇼크를 버텨냈다고 해서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이 한국 경제는 더 많은 원유와 더 큰 투자를 필요로 하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바꾸고 있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자본·에너지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은 부가가치를 끌어올렸지만, 동시에 원유 공급 차질이나 금융 불안 같은 외부 충격에 더 쉽게 흔들리는 구조를 키우고 있었다.


그 취약성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 1979년의 2차 오일쇼크였다.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다시 치솟자, 한국은 1차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물가는 급등했고, 성장률은 꺾였고, 외채 부담은 더 무거워졌다. 1970년대의 성장 공식이 더는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때 분명해졌다.


그 뒤에야 1980년대 초의 안정화와 구조조정이 뒤따랐고, 그 버팀 끝에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이라는 외부의 순풍이 불었다.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가 겹치면서 한국 경제는 다시 성장 궤도에 올랐다. 반도체, 자동차, 전자 같은 산업이 힘을 받았고, 한국은 다시 도약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다. 한국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고도 다시 일어섰고,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그러나 3저 호황은 한국 내부에서 저절로 만들어낸 필연이라기보다, 고통스러운 조정 끝에 찾아온 외부의 행운에 가까웠다.


Copilot_20260409_124239.png 사람의 손과 긴 노동시간이 한국 산업화의 기초를 떠받쳤다.


지금의 한국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시절 한국은 물자를 아끼며 절약을 생활화했고, 번 돈을 쪼개 모으며 저금통장을 늘렸고, 밤낮으로 기름때를 묻혀가며 물건을 만들어 수출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더 자주 보이는 풍경은 다르다. 월급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불안, 자산 가격 상승의 열차를 놓치면 영영 뒤처진다는 초조함, 그리고 빚을 당겨서라도 그 사다리를 붙잡으려는 압박이다. 로또 청약, 영끌 아파트, 리딩방 빚투 같은 말이 생활 언어가 된 사회에서 자산 가격 상승은 더 이상 예외적 욕망이 아니라 일상의 생존 전략처럼 받아들여진다.


그 이면에서 원리금 상환 부담이 큰 고위험가구는 빠르게 늘었다. 이들이 진 금융부채는 96조 1000억 원에 달한다. 그 안에서 청년층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더 뼈아프다. 절박함으로 세운 나라가 단꿈으로 버티고 있다는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이를 젊은 세대의 나태함이나 조급함 탓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왜 대학생이 학자금이나 생활비 대출까지 받아 주식 투자를 하게 되었는가. 왜 사회초년생이 월급만으로는 자산 형성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느끼는가. 왜 생산의 미래보다 자산 가격 상승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가. 개인의 선택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선택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다.


IMF는 한국의 가계부채가 2024년 국내총생산의 92.6%까지 높아졌고,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큰 점이 소비 둔화와 금융 취약성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성실하게 일해도 따라잡기 어렵다는 감각이 사회 전체에 번질수록, 빚을 내서라도 자산 가격을 추격하는 행동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Copilot_20260409_123505.png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산업화의 성과를 세계 앞에 선명히 내보인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벌어지는 여러 일들은 그다지 밝은 미래를 가리키지 않는다. 지금 한국 앞에 놓인 것은 과거 3저 호황 때의 저유가·저금리·저달러가 아니라, 고유가·고물가 압력·원화 약세가 겹친 사실상의 3고에 가까운 조건이다. OECD도 중동 분쟁과 에너지 가격 급등이 세계 성장률을 끌어내리고 물가를 밀어 올릴 수 있다고 봤다. 한국처럼 중동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경제에는 그 부담이 더 무겁다.


문제는 중앙은행도 어느 한쪽만 보고 움직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환율과 물가만 의식하기에는 가계부채와 부동산 금융의 위험이 너무 크다. 반면 성장만 보고 움직이기에는 전쟁, 유가 급등, 환율 불안 같은 바깥 충격이 너무 크다. 과거의 한국은 외부 충격을 생산과 절약으로 견뎠지만, 지금의 한국은 그 충격이 곧장 부채와 자산시장의 불안으로 번지는 경제 구조가 되었다.


여기에 미국발 신용 불안까지 겹치면 긴장은 더 커진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는 이란 전쟁이 유가와 원자재 가격 충격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더 끈질기게 만들고, 금리를 시장 예상보다 더 높게 밀어 올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사모신용 시장의 신용 기준 약화와 투명성 부족도 함께 지적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미국 금융시장의 균열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달러 강세와 위험회피가 커지고, 그 여파가 다시 한국의 PF와 가계부채, 자산시장 불안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외부의 충격이 국내의 약한 고리를 때리는 메커니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지금 한국 앞에 놓인 진짜 문제는 위기의 시점이 아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언제부터 한국 사회가 절박함을 잊고 성실한 노력보다 자산 가격 상승에 더 민감한 사회가 되었느냐는 데 있다. 과거 한국 사회가 불로소득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봤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 가능성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생 전략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 언제 멈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땀 흘려 만드는 것보다 자산 가격 상승이 더 확실한 미래처럼 보이기 시작한 그 어느 날부터였을 것이다.


Copilot_20260409_124256.png 오늘의 서울 야경은 성장의 결과와 달라진 태도가 뒤섞여 있다.


사무엘 헌팅턴은 로런스 해리슨과 함께 편집한 『Culture Matters』 서문에서 1960년대 초 한국과 가나의 경제 수준이 놀랍도록 비슷했다고 적었다.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 경제 대국이 됐고,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그는 그 차이의 핵심으로 한국인의 절약, 근면, 교육, 조직, 기강을 꼽았다. 그 문화의 뿌리는 절박함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를 목 놓아 부르던 과거의 마음은 그렇게 한국의 오늘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의지를 높게 사는가, 아니면 일확천금을 노린 단꿈이 퍼져 있는가. 오늘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떤 내일을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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