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수험생들

토끼굴에 떨어진 아이들은 장래를 생각할 기회조차 없다

by 우드코디BJ

"이건 아닌데."

화면 속 어머니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유모차 계급도를 처음 봤을 때는 어이없었다고 했다. 별게 다 있네 싶었다고. 그런데 쇼핑몰 유아 휴게실에 유모차가 줄지어 서 있으면, 어느새 자기 것을 먼저 찾게 된다고 했다. 남의 것을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눈이 가고, 한 번 보고 나면 마음이 묘하게 흔들린다고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솔직하게 말했다. 큰 지출을 하고 나면 그래도 내가 좋은 부모가 되어가고 있구나 싶어 마음이 좀 편해진다고.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비난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이를 가진 많은 부모의 속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내 아이를 뒤처지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남들만큼은 해주고 싶다는 조바심, 좋은 부모이고 싶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 그 어머니도 스스로 말했다. 계급도는 유모차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그다음은 학습지와 학원이라고. 모르는 세계가 나타날 때마다 흔들리고 위축된다고.

Copilot_20260410_122433.png 오만가지 '계급도'에 관한 인터넷 밈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그 흔들림은 학교에 닿는 순간 교사에게 전해진다. 얼마 전 유치원 교사의 하루를 풍자한 영상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웃음으로 만든 영상이었지만 반응은 서늘했다. 현직 교사들은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했고, 오히려 순한 버전이라고 했다. 보육교사 커뮤니티에는 아이 한 명당 잘 나온 사진을 수십 장씩 골라 올려야 하고, 퇴근 후 집에서 정리하면 밤 8시가 넘는다는 글이 올라온다. '이게 맞는 건지', '교사 생활에 회의가 든다'라는 댓글도 뒤따랐다.

좋은 선생님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선생님들을 먼저 지치게 만드는 구조. 이것 역시 우리 사회의 아이러니다. 임용 5년 안에 교단을 떠나는 젊은 교사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좋은 교사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회가, 정작 그 교사들이 오래 버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는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부모도 힘들고 교사도 힘들고 학교도 숨이 차다. 모두가 제 사정을 말하는 동안, 정작 학교의 주인공이어야 할 학생은 가장 조용히 중심 의제에서 밀려난다. 부모도 교사도 모두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이가 자기 미래를 스스로 상상하고 설계할 기회는 놀랄 만큼 적다.

아이들은 대학 입시를 향해 오래 달리지만, 그 대학의 학과 뒤에 어떤 산업이 놓여 있는지,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우지 못한다. 점수에 맞춰 학과를 고르고, 다시 수능을 치르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그때그때 가장 덜 불안해 보이는 선택지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해에는 코딩이 미래라고 하고, 어느 해에는 '의치한약수'라는 표현을 듣고 한동안 무슨 뜻인지도 몰라 주변에 물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모습은 대개 충분히 이해한 끝의 결정이라기보다, 불안 속에서 다들 그렇다고 여기는 쪽에 편승하는 느낌이 든다.

그 불안한 마음을 사교육이 파고든다. 초중고 사교육비가 해마다 최고치를 경신한다는 소식은 이제 낯설지도 않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찾고, 더 많은 사교육으로 불안을 달랜다. 기출문제를 푸는 아이 곁에서 부모는 검색창을 열고 또 다른 학원을 찾는다.

그럴수록 아이의 학업 일정은 더 빼곡해지지만, 자기 장래를 미리 들여다보고 왜 이 공부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시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수능 전까지 수험생 가족의 불안을 달래는 산업은 있지만, 정작 아이가 수능을 지나 마주할 학교 밖의 세상에 대한 선행학습은 없다.

몇 해 전부터 주변에 고3 자녀를 둔 지인이 생기면 책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남혁진 작가의 《40일간의 산업일주》였다.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같은 국내 주요 산업군이 어떻게 돈을 벌고, 누구와 경쟁하며,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지를 다룬 책이다. 고3의 책상 위에 놓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이었고, 너무 먼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책을 건넨 것은 대학 학과 이름보다 그 뒤에 펼쳐진 사회를 먼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 내용만으로 고른 책은 아니었다. 그 책을 쓴 젊은 저자의 인터뷰 기사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또래에 비해 실물경제에 대한 관심이 일찍 싹튼 것처럼 보였다. 대학 생활 내내 수백 건의 산업 리포트와 기업 공시, IR 자료를 들여다보고, 업계 종사자와 애널리스트를 인터뷰하며 이 책을 써냈다고 했다. 그에게 대학은 학점을 관리하는 시간이기보다, 예비 사회인으로서 자신을 갖추는 훈련장에 더 가까워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책 한 권이 학교 밖 사회를 향해 먼저 내민 그의 자기소개서 같았다.

책을 선물 받은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미지근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시험을 코 앞에 둔 수험생 가정에 이 책이 얼마나 의아하고 멀게 느껴질지, 나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건넸다. 훗날 대학생이 된 그 집 아이가 어느 날 책꽂이에 꽂힌 그 책을 다시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바람으로 말이다. 자신이 들어온 학과의 이름 뒤에 어떤 사회가 놓여 있는지, 세상은 어떤 속도로 바뀌고 있는지, 나는 어떤 질문을 품에 안고 공부의 가닥을 잡아야 하는지, 조금은 더 선명한 지향점을 가지고 대학 생활을 이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함께 그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는 뒷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 또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3의 책상 위에서는 산업에 대한 책 한 권보다 기출문제집 한 권이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미래를 준비한다는 길고 긴 학창 시절이 정작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한 번쯤 들여다볼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이 외려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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