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정세랑/문학동네)를 읽고.
**소설의 주요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름들을 힘껏 지키는 쪽으로,
2020 여름 정세랑
책 표지를 열자마자 하늘색 간지에 인쇄된 정세랑 작가의 친필 사인에 눈길이 머문다. ‘힘껏 지키는 쪽으로,’ 글씨에서 유독 힘이 느껴진다. 젊은 힘과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는 작가의 글씨체가 이 소설의 창처럼 여겨진다. 창 안에 무엇이 있을지 기웃거리는 심정으로 그 글씨들을 한참 들여다본다. 소설을 다 읽고 다시 간지로 돌아와, ‘사랑’ ‘힘껏’ ‘지키는’, 이 세 단어 속에 『시선으로부터,』가 담고 있는 메세지가 녹아있음을 깨닫는다.
책을 만들 때 간지에도 의미를 담는다. 보통 책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에 따라 간지의 색과 디자인을 결정한다. 이 책의 간지인 하늘색은 여성성, 진실, 탐구, 행복, 상쾌함, 순수함, 긍정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늘색 간지에서 어렴풋이 느껴진 경쾌한 분위기는 소설의 첫 장까지 이어진다. 첫 장에서 맞닥뜨린 ‘심시선 가계도’는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녀의 가족사가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다. 심시선이라는 인물로부터 뻗어나온 가계도를 보면서, <시선으로부터,>라는 제목이 그런 의미구나, 라고 깨닫자, 작가의 위트에 웃음이 나온다.
심시선은 한국전쟁때 가족을 잃고 새 삶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다. 그곳에서 화가인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나고,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따라 독일로 간다. 그녀는 마티아스 마우어의 폭력성과 정서적 학대 속에, 그림을 배우고 공부를 하며 7년여의 독일 생활을 견딘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고, 화가와 작가의 삶을 살며 자식들을 길러낸다. 그녀는 시대를 앞선 지식인 여성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전통과 관습을 깨는 언행으로 많은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강단 있고 따뜻한 여성이다.
이야기는 심시선이 세상을 떠나고 10년이 흐른 후, 그녀의 자손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보여준다. 소설의 각 챕터는 그녀가 남긴 저서, 인터뷰, TV토론회 발언 등으로 시작한다. 시선이 남긴 기록과 기억들은 남겨진 자손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현재의 삶 속에서 여전한 생명력을 가진다.
“심시선 여사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난정도 명혜의 말에 어느 정도 위안을 얻었다. 우윤이는 약해 보이지만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할 거야.(p.330)
자손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는 심시선은 그들의 삶에 방향타 역할을 한다. 시선의 자손들은 유전자 속에, 추억 속에 살아있는 시선을 그리워하며 각자의 삶을 단단하게 헤쳐나간다.
소설의 주 내용은 가족들이 심시선 사후 10주기 제사를 준비하는 이야기다. 생전의 심시선은 TV토론회에 출연해, 제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선의 장녀 명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선의 10주기 제사를 지내자고 한다. 심시선이 젊었을 적 살았던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것이며, 제사음식 대신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제사상에 올리자고 한다. “엄마가 젊었던 시절 이 섬을 걸었으니까, 우리도 걸어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합시다.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p.83) 그렇게 시선의 대가족은 하와이에서 각자 여행을 다니고, 훌라와 서핑을 배우고 박물관을 다니며 가장 멋진 순간을 수집해온다. 제사상에는 하와이에서 가장 맛있는 도넛, 팬케이크, 말린 레후아꽃과 화산석 자갈, 레이 목걸이와 소설책, 새 깃털, 가장 멋진 파도의 거품, 하와이 과일, 가장 맛있게 내린 커피, 시선의 이름을 붙인 산호를 심은 증서, 무지개 사진 등을 올렸다. 큰딸 명혜는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으로 훌라춤을 준비했다. 그녀의 훌라춤이 끝난 후, 서로의 보물에 대해, 시선과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이런 제사라면 특별하고 의미있고 행복할 것 같다. 모두 다 같이 움직여야 하는 단체관광이 아닌, 각자의 취향껏 여행을 즐기고 저녁이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 하와이의 보물을 발견하고 고인을 추억하는 특별한 여행과 제사의 결합은 그들만의 유쾌하고 아름다운 추모의 방식이다. 저 가족 속에 슬쩍 들어가 하와이를 여행하고, 팬케이크를 맛보며 심시선 여사를 추억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도 훗날 이런 제사와 가족여행의 결합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들이 시선의 제사상에 올릴 보물들을 발견해내는 과정은, 삶을 아름답게 해줄 보물들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발견한 삶의 보물들은 그들이 나아갈 삶의 방향을 비춰준다. 시선에게서 뻗어나온 그들은 시선처럼 어떤 나락의 순간에도 매순간 더 약한 것들을 지켜주는 길을 걸으려 한다. 강단 있으면서도 따뜻하고 여린 감성의 그들은 심시선이 남긴 또다른 보물들이다.
3대에 걸친 가족들의 사연이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하다. 사촌들끼리도 각별하고 서로에 대한 끈끈한 사랑이 읽는 내내 따뜻했다. 그런 각별한 친밀함 때문인지 비현실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이 소설은 가족판타지로 다가온다. 시선의 가족은 모계중심이다. 시선을 중심으로 뻗어나온 가족들은 이제 큰딸 명혜가 모계중심을 이어간다. 둘째 명은, 며느리 난정, 넷째 경아, 명혜의 두 딸 화수와 지수, 셋째 명준의 딸 우윤, 경아의 딸 혜림에 이르기까지 이 집안의 여성들은 씩씩하고 단단하다. 반면 이 집의 남자들은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하게 그려진다. 심시선은 그녀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 번째 남편도 두 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p.126) 심시선은 마티아스 마우어에게서 겪은 공격성과 폭력의 경험으로 인해, 그녀 곁을 순한 남자들로 채우고, 딸들에게는 시대의 억압에 굴하지 않도록 주도적인 성격을 물려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고 쓴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세랑 작가는 의도적으로 씩씩하고 주도적인 여성상과 모계중심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경향 중의 하나는 페미니즘적 요소다. 이 소설도 언뜻 보면 유쾌한 가족사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 속엔 시대적 억압과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들이 있고 폭력의 시대에 맞서 씩씩하게 삶을 살아낸 여성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다.
심시선이라는 울타리 안이 이해와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라면,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편견과 차별이 가득하다. 시선이 하와이에서 우연히 만난 마우티 마우어를 따라 독일로 간 이유는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시선은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마우어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쇼 같은 자살 이후 시선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도 넘은 비난은 또다른 폭력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 마우어와의 일들과 자신의 삶과 신념 등을 기록함으로써, 세상의 비난과 편견에 맞섰다. 남성에 의한 폭력을 이겨내고 삶을 헤쳐나가는 스토리는 시선에게서 손녀인 화수에게로 이어진다. 시선이 마티아스 마우어의 폭력과, 세상의 말과 편견이라는 또다른 폭력을 헤치며 삶을 살았듯이, 현재의 화수 또한 현실 곳곳에 도사리는 폭력성을 헤치며 나아가려고 한다. 화수는 대기업의 횡포에 분노한 협력업체 사장이 사무실로 찾아와 여직원들에게 뿌린 염산을 얼굴에 맞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화수와 동료들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가해자를 두둔하고 ‘얼마나 억울하면 그랬겠느냐고’ 가해자에게 이입하는 상황에 경악한다. 벌을 받아야 할 가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처벌과 단죄의 기회마저 비겁하게 회피해버린 상황에 분노가 치솟는다. 화수는 시선의 책을 읽으며, 시선이 마티아스 마우어의 폭력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부분’을 담담히 마주 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곤 시선이 그러했듯이, 정면으로 그것들에 마주 서서 헤쳐나가려 한다.
시선이 남긴 저서들 속에는 우리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명언들이 많이 나온다. 정세랑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선의 글과 말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위로의 말들이라고 했다. 나 또한 시선의 말과 글들을 읽고 통쾌했고 따뜻했고 위로받았다. 특히 좋았던 시선의 글들을 몇 개 옮긴다.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p.9)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p.281)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중략)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P.289)
가족들에게 시선은 앞선 어른, 닮고 싶은 어른이다. 시선의 10주기 제사와 가족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가족들은 그들의 맥박 속에 살아 숨쉬는 시선을 떠올리며 삶의 용기를 충전한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시선으로부터,』를 읽는 내내 따뜻함과 긍정의 기운, 유쾌함과 산뜻함이 마음 속에 차올랐다. 하와이의 청명한 하늘 아래, 발길 닿는 대로 거니는 기분이 들었고, 훈훈한 가족애가 물결이 번지듯이 내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심시선처럼 할머니가 되어서도 손자 손녀와 소통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싶다. 추억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조상이 되고 싶다. 심시선처럼. 이 책을 읽음으로써,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어떤 조각이 내 안에도 들어와 자리 잡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