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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Oct 18. 2020

카프카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_<아버지께 드리는편지>

(프란츠 카프카/정초일/은행나무)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장 사랑하는 관계이면서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이기도 하다.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은 자식이 독립된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못했을 때 주로 일어난다. 정서적 탯줄을 잘라내지 못하기도 하고, 자식의 인생은 부모가 결정해주어야 한다는 그릇된 사랑 방식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지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주고 사랑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되기도 한다.      

 

 카프카는 관계의 단절 대신 관계의 개선을 택했다. 아버지로부터 정서적 탯줄을 잘라내고 자립하기 위해, 아버지와 동등하고 행복한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썼다. 비록 이 편지가 아버지께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아버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로 시작하는 이 편지글은 카프카가 아버지께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들, 평생 가슴에 담아두었을 말들을 가슴 깊은 곳에서 퍼올려 펼쳐놓은 듯하다. 책 한 권 분량의 긴 편지 속에는 강압적인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상처받고 위축된 그의 성장 과정, 글쓰기와 결혼 문제에서 존중받지 못한 섭섭함과 수치심 등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카프카에게 있어 아버지와의 관계는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으며 해독되지 않았던 수수께끼들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내면 속으로, 그의 작품 속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는 문을 통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야 한다.     


  카프카는, “제 글쓰기의 주제는 아버지십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기대어 푸념하지 못하는 것들만 글에서 털어놓았을 뿐입니다. 글쓰기는 아버지와의 작별을 의도적으로 지연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p.93) 라고 말한다. 그가 남긴 작품들 속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를 지배했던 감정과 생각들이 여러 형태로 변형되고 은유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카프카의 내면에 드리운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글쓰기는 아버지와의 작별을 의도적으로 지연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도, 그가 아버지께 긴 편지를 쓰는 이유가 아버지께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늘 그를 힘들게 했고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개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말과 행동들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그래서 그가 얼마나 상처 받았고 수치심을 느꼈는지를 말할 때는 자신의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기 위한 자기고백서 내지 자기 치유서로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거나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더 깊이 탐색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자기 치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간도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편지 뿐 아니라 그가 쓴 작품들 곳곳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그림자는 그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의 상처 받은 내면아이를 보듬어 주기 위한 그만의 생존 방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겉으로 자라나지 못한 여린 자아는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 자의식이 성장하고 깊은 사유의 글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편지에서 카프카는 끝없이 지적하고 위협을 가하는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늘 수치심을 느끼고 도피할 궁리만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폭군 같은 양육자가 아이의 어떤 성향을 강화하는지 잘 드러난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상으로 만들기 위해 강하게 몰아붙였지만, 받아들이는 아이는 자신이 멍청하며 못났다는 수치심과 함께 뿌리 깊은 죄책감 때문에 무력감이 강화된다. 카프카는 크고 대단한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렸다. 아버지가 험한 말로 다그치고 때릴 듯이 허리띠를 위협적으로 풀어제끼기도 했지만 실제로 카프카를 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죄책감과 수치심이 가득한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지 않으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격도 없는 내가 아버지의 은총으로 목숨을 또 부지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의식, 즉 자존감을 갖지 못한 아이는 결국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회피하고 수동적인 성격이 강화된다.      

 

 자식이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넌 그 일을 반드시 실패할 거야.’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서 ‘나는 소중하며, 유능한 존재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을 칭찬하고 격려하기가 쉽지는 않다. 특히 그 당시의 아버지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카프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읽을수록 카프카가 평생 마음 속에서 느꼈을 자멸감이 생생하게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이 책에는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뿐 아니라, 부록으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와 누이 동생 엘리에게 보내는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누이 동생 엘리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책 전체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세지가 담겨있다. 엘리의 아들을 기숙학교에 보내도록 권유하고자 쓴 이 편지에는 가족이란 무엇이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들이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했던 카프카가 경험으로 터득한 생각들이기에 구구절절 와닿는다.      


 가족이란 하나의 유기체이긴 하지만, 극히 복합적이고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유기체란다. 그러므로 다른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균형 상태를 추구하지. 이러한 노력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균형 상태를 지향하여 실행될 경우, 이 균형화 과정을 가리켜 교육이라고들 부른다. 하지만 왜 이렇게 지칭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교육, 즉 형성 도중에 있는 인간의 제반 능력이 발현되도록 차분하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교육, 또는 자립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허용해주는 교육을 여기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지. (p.141~p.142)     

 

 가족과 교육에 대한 그의 지적이 뼈아프다. 그의 말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서적 폭력이 교육이라는 포장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형성 도중에 있는 인간의 제반 능력이 발현되도록 차분하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교육’, ‘자립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허용해주는 교육’은 언제나 우리의 이상적 교육관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할 때가 많다. 단지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어떤 사랑은 넘칠수록 불행을 가져온다. 부모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으로 기다려 주어야 진정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을 향해 들어가는 관문이면서, 내가 자라면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았던 상처를 떠올리게도 하고, 나는 아이에게 어떤 부모인가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짧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고, 모든 문장을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버릴 게 하나 없는 문장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카프카의 세계로 들어가는 현관문을 막 들어서게 되어 설렌다.      



읽은 때 : 2020.07.06~2020.0719.

기록한 때 : 2020.07.20.

별점 : 4.5/5.0

한줄 평 :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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