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유호식/문학동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페스트』를 다시 꺼내 읽는 이들이 많아졌다. 팬데믹 초기, 칼럼과 매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학작품이 『페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감염병 확산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현재의 재앙을 이해하고자, 70여년 전 소설 속 재앙으로 눈을 돌렸다. 코로나19가 확산된 지 9개월여가 지난 현재는 세계 석학들의 포스트 코로나 관련 책들이 발빠르게 출간되고 있지만, 팬데믹 초기에는 현재를 해석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문학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렇다면, 『페스트』는 현재 전세계가 겪고있는 이 재앙을 헤쳐갈 방향과 희망을 보여주는가? 이 소설에서 가리키는 방향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유효한가? 1947년에 카뮈가 이 책을 쓰던 당시에는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가 아니었는데, 그는 왜 이 소설을 썼을까?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답을 주는 장르가 아니라 질문하는 장르이다. 많은 질문을 만드는 작품일수록 많은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답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질문을 만든 각자가 자신의 답을 찾아야 한다. 책을 읽었다고 답이 또렷해지지는 않는다. 때론 노골적인 저자의 답이 우리에겐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답을 거부하고 싶을 때도 있다. 저자가 내미는 답을 거부한 자리에 또 다른 질문과 생각의 사슬이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책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은 맞지 않다. 적어도 문학에서는 그렇다. 문학 속에 있는 건 답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 인간들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고 작가의 눈에 포착된 자화상이다. 모든 길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이다. 우리의 세상이 어떻게 나아갈지, 이 끝엔 무엇이 있을지, 세상의 일부인 나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 이 소설은 훌륭한 출발지가 된다.
7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는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은 재앙이 퍼지는 과정에서 인간들의 삶과 감정의 변화, 재앙을 대하는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페스트 초기에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불안감이 증폭됨에 따라 종교로 구원받으려 하고, 가짜뉴스에 현혹돼 엉뚱한 물건들을 사들이기도 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향락에 빠지기도 한다. 사재기와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폭동의 기미를 보이는 등 지금의 코로나19상황과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카뮈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다.
특징없고 평범한 도시 오랑에 어느 날 쥐들이 죽은 채 발견된다. 수백 수천마리의 쥐 시체가 발견된 후, 쥐 시체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자 이제는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다. 쥐벼룩에서 옮겨온 페스트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서 도시가 봉쇄된다. 도시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이 도시에 잠시 들른 사람조차 도시 밖으로 나가지 못해 급작스러운 이별의 감정이 도시를 지배한다.
이 소설은 의사 리외, 그리고 그를 도와 자율 보건대를 조직해서 페스트와 싸워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시 당국의 대처가 미흡하자 장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했고, 시청 말단 직원인 그랑, 오랑에 발이 묶인 신문기자 랑베르, 파눌루 신부 등이 보건대에서 일을 돕는다. 카뮈는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비교적 직접적이고 비장하게 드러낸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 연대와 성실성 등이 리외와 장 타루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언급된다. 그럼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탁월한 묘사와 문학적 표현들,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 등이 감동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재앙이 지나가버릴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지는 쪽은 사람들, 누구보다도 인본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리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p.51)
여기서 말하는 ‘인본주의자’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인 민음사 버전에서는 ‘휴머니스트’라고 표현되어 있다. 휴머니스트라는 표현은 이 문단의 의미해독에 어려움을 준다. 인본주의자라는 말도 같은 뜻이긴 하나, 인간 중심이라는 의미가 더 쉽게 떠오른다.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이 재앙이 곧 지나가버릴 것’이라고 여기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은 전염병 예방보다 우선시된다고 여긴다. 코로나 19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을 부분이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칫 방심한 순간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외의 것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건강, 청렴결백함, 순결함 등은 의지의 소산이에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의지 말이에요. 정직한 사람, 거의 아무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방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해요. 절대 방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요, 리외.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 (p.295)
카뮈는 전쟁과 폭력성의 비유로써 페스트를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페스트를 전염병 자체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장 타루의 대사인 위 발췌문으로 미루어, 페스트가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방심하는 순간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방심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이 공감된다.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에도 너무 잘 들어맞는다.
카뮈가 의사 리외와 보건대 봉사자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영웅주의도 희생정신도 아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개인은 공동체와 별개일 수 없다는 점, 그러므로 연대와 행동이 따라야만 인간의 소중한 일상과 행복이 유지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따른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연인을 만나기 위해 불법으로라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랑베르를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결국 랑베르는 도시를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페스트가 물러갈 때까지 오랑에 남는다. 그가 떠날 수 없었던 건 남아있는 보건대 사람들 때문이다. 내가 랑베르였다면 어땠을까?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족 곁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나라면, 마지막 순간에 랑베르의 발목을 잡았던 우정과 의리를 택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했을 것 같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것을 알기에 그 어떤 결정도 못 내렸을 듯하다.
이 소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건지 질문하고 있다. 재앙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없다. 아무리 영웅적인 행동도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운명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인간이기에,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이다. 시시포스처럼 무력해보이는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해나가는 것, 공동체의 재앙에 눈감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인간다움이고 인간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페스트 그리고 삶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식과 기억뿐이었다. 타루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말한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p.340)
재앙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이길 수는 없다. 페스트가 잠시 물러갔다고 해서 인간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코로나19가 지나가더라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희생을 치루고 이 상황들이 지나간다 해도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식과 기억 뿐이리라. 결국 인간에게 남는 것은 인식과 기억이 전부라는 말에 공감하지만,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공동체의 아픔에 도망가지 않고 함께 이겨낸 자만이 인식과 기억을 남길 수 있다. 그렇게 연대하고 함께 헤쳐나간 후에 얻는 인식과 기억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또다른 재앙에 맞설 수 있는 지혜를 준다.
현재 우리의 삶을 옥죄는 코로나19라는 재앙에 맞서, 21세기의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공동체와 나,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과 답을 고민하는 것부터가 출발이다. 코로나19라는 재앙이 우리를 출발하게 했으나, 되돌아올지 더 나아갈지는 우리의 몫이다. 저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읽은 때 : 2020.06.01~06.11/2020.09.20~09.22.
*기록한 때 : 2020.09.26.
*별점 : 4.0/5.0
*한줄평 : 문학은 시대를 초월해서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임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