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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와 서리

by 김태민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다. 오늘은 러닝을 포기하고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었다. 산책하는 동안 빗줄기는 차츰 가늘어지더니 흩날리는 물방울로 변했다. 뺨에 닿은 빗방울이 차갑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은 하나 둘 가을 옷을 꺼내 입었다. 가을비는 거리에서 여름의 색깔을 씻어냈다. 얇은 홑이불을 세탁해서 장롱에 집어넣어야 할 때가 됐다.


날은 선선하지만 하늘은 며칠째 잿빛이다. 9월 말부터 거의 3주째 비 내리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 추석 연휴 내내 흐린 날씨였다. 희끄무레한 달무리를 두른 보름달은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비추고 사라졌다. 초가을 늦더위를 피했더니 뜻밖의 가을장마가 발목을 잡았다. 날씨와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계절은 어느새 가을의 문턱을 넘었다. 길고 하얀 꼬리를 단 여우 같은 안개가 관모봉을 타고 동네로 내려왔다. 희뿌연 안갯속에서 가랑비는 는개가 됐다. 산등성이 위로 녹아내린 솜사탕 같은 구름이 내려앉았다. 멀리 보이는 안양고가교는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유조선 같았다. 다리를 떠받치는 높은 교각을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안개를 뚫고 나온 차들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도로 위에 남은 소음만 어지럽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안개는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색온도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산란하는 불빛은 바람을 맞고 눈앞에서 흩어졌다. 꼭 꿈과 현실의 경계선 사이에 서있는 것 같았다.


안개인지 비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는개는 계절감을 지운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공기는 차갑지만 바람은 선선하다. 짙은 안개 너머 보이는 하늘의 가장자리는 선명한 흰색이다. 회색빛 커튼 뒤로 햇살에 물든 새하얀 그림자가 하늘거린다. 지루한 가을장마가 만든 터널을 벗어나면 눈앞에 잊고 있었던 가을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올가을은 작년보다 짧을 것 같다. 가을장마를 겪은 해는 겨울이 더 빨리 찾아온다. 노랗게 물들기도 전에 은행잎이 벌써 하나둘씩 떨어지는 중이다. 다음 주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비가 그치는 주말부터 최저기온은 10도 아래로 내려갈 예정이다. 몇 주만 지나면 아침마다 이슬이 맺혔던 가지 위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을 것이다.


벌써부터 겨울을 걱정한다. 오래된 버릇이다. 찬바람만 불면 우리 가족은 걱정을 달고 살았다. 낡고 오래된 연립주택은 혹한기만 되면 수도가 얼고 보일러 배관이 터졌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매년 힘겹게 겨울을 버텼다. 몸에 익은 생활은 나이가 들면서 습성이 됐다. 불편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법에 익숙해졌다.


아크릴로 짠 까끌까끌한 스웨터도 매일 입다 보면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불안은 좀처럼 떨쳐내기 힘들었다. 발끝에 달라붙어서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 같았다. 몸은 번거로운 생활에 적응했지만 마음까지 무던해질 수는 없었다. 초가을 무렵부터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을 생각했다.


살면서 한 번도 겨울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나이가 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기분은 날씨처럼 변하지만 기질은 기후와 같아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보다 무사히 겨울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더 컸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걱정하면서 겨울을 보냈던 날들은 늘 외롭고 괴로웠다.


세월이 지나도 추억이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오랜만에 들여다봤지만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어서 눈길을 거뒀다. 통증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아직 감각이 남아있다. 무뎌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흩날리는 는개를 보면서 서리를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몇 명쯤 더 있을까? 찬란한 계절 앞에서 길고 어두운 터널을 떠올리는 삶은 여러모로 참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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