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도 90년대 무드를 느낄 수 있는 시대다. 초등학생 시절 유행했던 와이드팬츠나 오클리 선글라스 디카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2000년대를 재해석한 패션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90년대를 넘어서 이제는 7,80년대 스타일까지 믹스매치 되고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을 달고 온갖 것들이 다 부활하고 있다. 스타일의 종착역은 공간이다. 오래된 서울을 상징하는 골목은 모두 힙플이 됐다. 성수동, 문래동, 북촌과 을지로, 서순라길, 한남동, 이태원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 죽어가던 명동이나 전자상가의 추억이 있던 용산 그리고 한 때 찬란했던 홍대까지 모두 부활했다. 홍콩이나 도쿄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처럼 서울도 이제는 고유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서울 정도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수도 한복판에 고궁이 즐비하고 역시를 품은 유적지와 화려한 고층빌딩이 같은 공간에 서있다. 어르신들이 찾던 낙원상가 거리는 이제 1,20대들이 찾는 핫플이 됐다. 용접공들이 땀 흘리며 밤낮을 일하던 을지로는 카페와 펍이 가득한 골목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빨간 벽돌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남동은 외국인들이 찾는 명소가 됐고 용산역 주변 한강대로길은 호텔과 빌딩이 늘어선 동네로 변신했다. 대학시절 디자인 전공하는 친구와 옷본을 들고 돌아다녔던 성수동은 서울 최고의 1 급지가 됐다. 강남은 여전히 강남이지만 송파나 용산 그리고 성수를 보면 서울도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동네를 가도 예쁜 가게들을 볼 수 있는 시대다. 서울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 교토에도 인스타에서 볼 법한 한국 카페들이 영업 중이다.
경제력이 성장하면 양보다 질을 추구하게 된다. 실용성보다 심미안에 공을 들이고 미의식 역시 다채롭게 분화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핫플레이스들이 주는 인상이나 느낌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멋진 공간은 대부분 연출된 이미지와 치밀한 마케팅의 산물이다. 힙이나 핫은 전부 필연적으로 돈과 엮여있다. 사람들은 공간에 깃든 분위기를 소비하기 위해 지갑을 연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라는 동물의 습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90년대를 지배했던 신촌과 대학로도 그랬고 2000년대의 패권을 지켰던 홍대와 명동도 똑같았다.
사람들의 본바탕이 변하지 않으므로 유행은 돌고 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행을 예측하기보다 현재를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 낫다. 물음표는 접어두고 느낌표를 받아들인다. 복잡한 생각은 적을수록 좋다. 진짜 1990년대는 별로였다. 연출되고 각색된 지금의 90년대 무드가 월등하게 낫다. 아름다운 추억들은 남아있지만 낭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그냥 야만의 시대였다. 낭만 같은 표현은 과거의 기억이 미화된 결과물이다. 추억은 미화될 수 있지만 기억은 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봐도 기괴한 시대였다.
부촌이나 빈촌 모두 빈집털이나 도둑이 극성을 부렸다. 유괴나 인신매매 같은 강력범죄가 너무나 흔해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오는 참사가 거의 매년 반복됐다. 무엇보다도 흡연의 자유가 당연했던 시절이라 어딜 가나 담배연기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때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이서 보면 지독한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제법 아름다운 희극이니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것만 보고 누리는 편이 낫다.
8,90년대 무드를 아름답고 멋지게 연출한 지금의 유행은 그래서 맘 편하게 즐길만한 것 같다. 사람들이 살면서 흔적은 공간에 남는다. 시간은 누적되고 역사는 퇴적되면서 공간에 정체성을 형성한다. 낡은 골목이 품고 있는 온기와 오래된 동네에 깃든 고유한 분위기가 곧 매력이다. 그리고 매력은 발걸음을 이끄는 힘을 갖고 있다. 어쨌든 아날로그가 동반하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은 사람냄새를 품고 있어서 매력적이다. 살아보지 않는 시대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자극 앞에서 관심과 눈길이 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잠시 이어지다 끝날 줄 알았는데 레트로붐은 뉴트로와 힙트로를 거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경험해보지 못한 시절을 체험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페스티벌과 이벤트, 팝업 행사가 끊이지 않는 현실 이면의 그늘이 눈에 들어온다. 레트로무드의 끝없는 호황은 한국이 저성장불황에 접어들었다는 시그널이다. 추억을 그리워하고 소비하는 것은 정상이지만 추억만 소비하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정체다.
사회문제가 심화되면서 변화불가능한 수준으로 고착화되면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한다. 국민들의 삶이 힘들고 생활이 어려울수록 즐길거리는 역설적이게도 더 많이 늘어난다. 일본의 2000년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우리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다. 기울어가는 배 위에서 끝나지 않을 화려한 선상파티를 하는 기분이다. 달콤하게 익은 추억은 여전히 향기로운데 불빛너머 보이는 바다는 어둡고 차갑다. 쓸데없는 걱정을 훌훌 털어내고 싶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화려할수록 초라해지고 열광할수록 외로워지는 시대로 가고 있다.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 축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들 더 즐거운 것일까? 취해있으면 깰 필요가 없으니까 점점 더 깊게 취해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