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굴

by 김태민

경수대로를 걷다 토끼굴을 발견했다. 화단 위 밑동만 남은 나무 옆에 구멍이 나있었다. 정말 토끼가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양은 영락없는 토끼굴이었다. 어렸을 적 산에서 봤던 모습과 꼭 닮았다. 귀를 쫑긋 내밀고 있는 산토끼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굴 밖으로 나온다.


몸을 다 드러낼 때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실제로 보면 새빨간 눈동자가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다. 지금은 산에서 야생토끼를 볼 일은 거의 없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이후로 안양에서 토끼를 만난 적은 없다. 그래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토끼굴이 신기했다.

살다 보면 정말 가끔씩 거짓말 같은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자연스럽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올랐다. 눈앞에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구아파트 옆 대로변에 원더랜드로 가는 입구가 있다면 꽤 멋질 것 같다. 판타지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와 현실감이 적당히 믹스매치되는 순간 생명력을 얻는다.


화단 위로 뛰어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렀다. 가까이 다가가서 내 눈으로 굴 속을 확인하고 싶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토끼굴이 맞다면 토끼를 만날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빛나는 팥알갱이 같은 작고 빨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망상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만약에 원더랜드로 드나드는 통로라고 생각해 보면 위치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출입구는 접근성이 중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 속보다 아파트단지가 낫다. 눈에 잘 띄고 설명하기도 쉽다. 해리포터 속 포트키처럼 버려진 물건으로 위장하면 찾기 너무 힘들 것 같다.


산 속이나 들판에서 쓰레기를 찾아다니는 쪽보다는 토끼굴이 훨씬 마음에 든다. 굴 속으로 들어가려면 몸이 작아지는 주스를 마셔야 할 텐데 제로슈가였으면 좋겠다. 몸이 커지는 컵케이크도 저당이면 망설이지 않고 먹을 텐데 쓸데없는 싱거운 공상이 계속 됐다.


그러다 문득 토끼가 아니라 들쥐가 파놓은 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은 이쪽이 훨씬 더 높다. 밤이 되면 쥐들이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아무리 멀리하려고 해도 쥐는 문명의 시작부터 인간과 함께했다. 친구나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이지만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한강이나 서울숲에도 들쥐가 산다. 강남 빌딩숲 한복판에서 골목을 뛰어다니는 쥐를 본 적 있다. 사람들이 많은 도시는 필연적으로 쥐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안양도 예외는 아니다. 굴의 주인이 토끼에서 쥐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자마자 내면 깊숙한 데서 거부감이 고개를 들었다.


토끼굴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하지만 쥐는 햇빛이 드는 양지바른 자리에 쥐구멍을 만들지 않는다. 포식자들이 찾을 수 없는 서늘한 그늘을 선호한다. 토끼도 상위포식자를 피해서 굴을 파지만 볕이 잘 드는 능선이나 언덕에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주간에 활동하는 포유류에게 남향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입주조건이다. 아파트 담장을 따라 몸을 숨길만한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줄지어 늘어서있는 데다 햇살도 잘 들어온다. 범계역 주변에 이만한 보금자리는 없다. 도로를 가로질러 넘어가면 안양천이 있지만 별로다.


꽃덤불이 우거진 경사로는 단단한 콘크리트 제방이다. 땅 속을 파고들 틈이 없다. 추론 끝에 쥐구멍이 아니라 토끼굴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편이 마음이 편하다. 당장이라도 들쥐가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상상을 했더니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귀여운 설치류는 하늘다람쥐와 햄스터 정도다. 멋대로 토끼 없는 토끼굴이라고 정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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