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그

by 김태민

낮부터 내린 겨울비는 이케아를 나오자마자 진눈깨비로 변했다. 차 앞유리창 위로 투명한 얼음꽃이 쉴 새 없이 피었다 사라진다. 회색빛 비구름은 뿌연 안개로 만든 솜사탕 같은 눈구름으로 변했다. 흩날리는 눈보라 사이로 보이는 불 꺼진 아파트단지는 바짝 마른 겨울나무처럼 공허해 보였다.


일직로를 지나 화창교를 넘어왔다. 도로 위 차량행렬은 도시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흩어졌다. 카페에 들렀다 가려다 맘을 바꿨다. 혹시라도 길이 얼어붙기 전에 귀가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뒤에 실은 러그와 매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려서 뒷좌석을 봤다. 일단 고르기는 했는데 탁월한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눈보라 몰아치는 주말 오후에 이케아에 가는 악수를 뒀다. 눈치게임을 생각하고 주차장을 빙빙 돌 각오를 했는데 막상 가보니 제법 여유로웠다.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카트를 끌고 곡예운전을 해야 할 만큼 인산인해는 아니었다.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러그가 있는 14번 코너로 직행했다. 숏컷을 이용해도 갈 때마다 내부구조가 헷갈린다. 비상대피로가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지만 막상 화재알람이 울리면 출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이케아는 미로 같다. 할인표시가 붙은 식기류에 눈길을 주는 친구를 만류하고 앞만 보고 전진했다.


하지만 친구가 원했던 베이지색은 매장에 없었다. 애초에 생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쉬웠다.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대표하는 컬러인 크림색 러그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버터크림이라고 부르는 색인데 색온도가 따뜻해서 좋다.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 모델인 YJM 컬러보다 조금 더 진한 색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컬러는 보고만 있으면 포근한 기분이 든다. 서양식 소스의 바탕이 되는 버터와 밀가루를 사용해서 만드는 루가 버터크림색이다. 화이트 루와 블론드 루를 알맞게 섞은 중간색인데 한국에서는 큰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색감은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즐겨 먹는 라클레트 치즈에 제일 가까운 것 같다.


사람들은 대체로 깔끔하고 단정한 무채색이나 화사한 분위기의 밝은 톤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컬러는 비주류에 가깝다. 버터크림색이 드물듯이 말라카이트 그린이나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이 들어간 아이템도 찾아보기 힘들다. 순전히 말라카이트 그린이 좋아서 우연히 간 매장에서 컨버스 척 70을 덜컥 산 적도 있다.


베이지는 포기하고 미디엄그레이와 오프화이트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내 미적감각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과 함께 친구로부터 선택권을 넘겨받았다. 그래도 양자택일은 늘 어렵다. 잠시 논의를 거쳐서 우리는 오프화이트를 선택했다. 남자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른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예뻐서 고른 게 아니라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톤다운된 색온도가 튀거나 모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세탁기를 여러 번 돌려서 생활감이 느껴지는 흰색이라 좋았다. 물 빠진 피그먼트 같은 색감도 마음에 들었다. 장모러그와 단모러그 중 어느 쪽이 관리하기 편한지를 고민하는 친구에게 어차피 세탁 못한다는 말로 못을 박았다.


카펫이나 러그는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를 차단하고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보일러로 바닥난방을 하는 한국식 주거환경과 궁합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린 시절 집 거실에 깔려있었던 커다란 카펫이 떠올랐다. 테두리에 화려한 술이 달려있는 아라베스크 무늬가 들어간 멋진 양품이었다.


양반다리로 카펫을 깔고 앉아서 종종 디즈니 알라딘 속 양탄자를 타는 상상을 했다. 덕천마을에 살던 중동출신의 산업연수생 형이 주고 간 선물이었는데 몇 년간 잘 썼다. 자잘한 오염과 얼룩들이 쌓여서 결국 버렸지만 기억 속에 모습이 남아있다. 계산대 밖으로 나오는데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고심했지만 단념하고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들이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빙판길을 예상했는데 도로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친구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 러그를 깔았다. 생각한 것보다 괜찮았다. 눈발을 헤치고 찾아가길 잘했다. 결과가 좋으면 피곤한 과정도 납득할 수 있다. 합리화에 익숙해졌다. 이제 그럴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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