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기억

by 김태민

버스를 타려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길건너편에 서있는 커다란 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전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참 예뻤다. 2025년이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같은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정반대의 감정이 떠올랐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 너무나 막막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까마득한 옛날 일 같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늦은 새벽에 겨우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눈을 뜨면 긴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시작부터 진이 빠졌다. 하루가 너무나 길었다.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걱정과 불안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지난겨울의 나는 월동준비를 끝내지 못하고 혹한기를 맞이한 산짐승 같았다.


눈 덮인 설산에 갇힌 채 서서히 말라가는 처참한 기분을 느끼면서 바닥으로 느리게 가라앉았다. 상투적인 몇 가지 단어로 자신을 정의하고 싶지 않아서 기를 쓰고 발버둥 쳤다. 무력감을 떨쳐내려고 매일 헬스장에 갔다. 공허한 감정이 내면을 장악하면 노트북을 켜고 곧바로 글을 썼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소화되지 않는 감정을 되새김질하면서 밤을 새우는 것보다 지쳐서 잠드는 편이 나았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질질 끌고 다니느라 몸과 마음 모두 심하게 지쳤다.


거의 매일 갈림길 앞에서 멍하니 있다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작년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봄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였다.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는데 지금은 지나갔다.


형편이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괴로웠던 순간들이 희미해졌다. 밤새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을 뒤덮은 것 같다. 감정은 희석되고 기억은 흐려졌다. 망각은 축복이다. 적당히 잊고 가능하면 비우고 사는 삶이 곧 행복이다. 고통은 총량이 존재한다.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의 뇌는 망설임 없이 망각을 선택한다.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기억이 끊어진 구간이 존재한다. 흐릿한 윤곽선은 남아있지만 구체적인 형태는 드러나지 않는다. 손상된 필름을 현상해서 뽑은 사진처럼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되돌아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 속을 가로지르는 뿌연 안개가 만든 회색지대는 모든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려다 금세 길을 잃고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훼손된 기억의 회로는 무의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망각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다.


아픔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삶을 향한 본능이다. 발버둥 치면서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고 싶은 강하고 애처로운 몸짓이다. 그래서 사라진 기억들에다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이름표를 붙이지 않았다. 지금보다 성장하게 되면 보이지 않았던 안개 너머의 풍경을 보면서 고단했던 여정에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발견하는 날이 찾아오면 좋겠다. 작년 겨울이 너무나 길었는데 막상 남은 기억은 몇 개뿐이다. 그 마저도 새로운 겨울이 찾아오면서 차츰 희석되다 이제 아예 희미해졌다. 돌아보면 계절의 문턱 앞에서 막막한 기분으로 차가운 눈을 맞았던 내가 서있다.


새벽까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옥상에 쌓인 습설을 치우고 죽은 듯이 잠들었던 밤이 기억에 남았다. 밤하늘 아래 끝없이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했었다. 그랬던 내게 봄이 찾아왔다. 제일 큰 기적은 늘 사람이다. 커다란 반전은 없었지만 작은 노력들이 모여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 줬다.


퍼펙트게임이나 연승은 없었지만 신승 끝에 다음 경기에 나갈 여력과 끈기를 조금 회복하게 됐다. 다시 겨울이다. 한 해의 끝이다. 봄은 아직 멀리 있지만 소중한 인연을 통해 얻은 따스한 온기와 찬란한 햇살을 품고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살아있길 잘했다.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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