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린 다음날이라 오늘은 부쩍 날이 차다. 목덜미를 움츠린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뒷머리자락을 움켜쥐려던 헤무른 바람이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실내는 생각 외로 따뜻했다. 나갈 때 창문을 전부 닫아두길 잘했다. 신발을 벗고 장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놨다.
신발장 위에 쌓인 고지서들을 확인하고 찢어서 버렸다. 더는 편지를 찾아볼 수 없는 우편함을 보면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을 주고받던 시절이 지금은 꿈같다. 나그참파 인센스 스틱을 꺼내서 불을 불였다. 친구가 준 선물인데 올 겨울 내내 잘 쓰고 있다.
창문을 반쯤 열었더니 연기는 곧바로 이지러졌다. 코 끝에 닿은 겨울바람에서 물에 젖은 나무와 낙엽냄새가 났다. 가만히 서있으면 아련한 기억들이 멋대로 떠오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했다. 찬 공기가 물결처럼 집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바다 한가운데 서서 파도를 맞는 기분이 들었다. 공상과 망상을 오가는 장면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소기를 돌리고 분리수거함을 비웠다. 수건을 개서 수납장에 넣었다. 집안일을 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물 한잔 마시고 장바구니에서 내용물을 하나씩 꺼냈다.
마감세일에 딱 맞게 도착해서 찬거리를 싸게 샀다. 제육볶음용 돼지전지와 호주산 소불고기를 한 팩씩 건졌다. 한돈으로 만든 소시지도 있었지만 같은 육류라도 가공이 덜 된 쪽에 손이 간다. 손질한 대파와 깐 마늘 큰 봉지도 샀다. 잘게 썰어서 파기름만 내면 볶음요리 절반은 끝이다.
반찬을 만들 때는 주로 조림과 볶음을 선택한다. 보관하기도 좋고 밥에 얹어먹기도 편하다. 설거지 거리를 만들기 싫어서 밥그릇에 찬을 얹어서 먹는다. 볶음밥이나 비빔밥 같은 한 그릇음식을 한동안 즐겨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살짝 물려버렸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계산을 하려다 말고 유통기한 임박 라벨이 붙은 시즈닝 스테이크를 하나 골랐다. 정말 먹고 싶은지 여러 번 생각해 보고 결론을 내렸다. 오래된 버릇이다. 불혹을 앞두고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식욕과 허기가 식도를 타고 빠르게 역류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스테이크를 먹기로 결정했다. 70% 세일하는 양송이와 아스파라거스도 담았다. 이왕 먹는 거 가니쉬도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았다. 홀그레인 머스터드까지 사려다가 그만뒀다. 스테이크를 자주 먹을 일도 없는 데 굳이 사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집을만한 마땅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카드를 꺼내서 계산을 마쳤다. 매장에서 스테이크를 사 먹으려면 일주일치 식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분위기를 내려면 레스토랑이나 비스트로가 제격이겠지만 내 형편에 맞지 않는 소비다. 호텔에서 파인다이닝을 대접받았을 때도 훌륭한 맛보다 가격에 신경이 쓰였다.
진심이 깃든 호의였는데 속으로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기분 좋게 먹고 나오면서도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여유가 없는 시절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마음도 조금 남루해진다. 남들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남들처럼 즐거워하는 법을 조금씩 잊게 되는 것 같다.
숫자에 신경을 쓰다 보면 여유롭게 즐길 만한 여력이 사라진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지갑을 갖고 다니는 삶에 따르는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행복을 찾아다니면서 합리화를 하는 생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때때로 피곤할 때가 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내려고 애쓰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애잔하게 느껴졌다.
한참 혼자 재밌게 놀다 지쳐서 물끄러미 대문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이 잠시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기분과 긍정 끝에 따라오는 피로감이 묘하게 닮았다. 잡념을 떨쳐내고 요리를 하기로 했다. 달군 팬 위에 기름을 붓고 채끝살 스테이크를 올렸다. 시즈닝이 된 상태라 따로 마리네이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꺼낸 가염버터를 잘라서 고소한 풍미를 더했다. 시어링이 잘됐는지 고기 표면의 색감이 나쁘지 않았다. 썰어놓은 양송이와 아스파라거스도 같이 구웠다. 후드가 고장 나서 집안의 창문을 전부 다 열었다. 마이야르 반응과 탄내는 한 끗 차이다. 연기를 마시면서 구운 스테이크를 하얀 접시에 옮겨 담았다. 찬장에서 포크는 찾았는데 막상 나이프가 없었다.
가위로 적당히 잘라서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아쉽다. 그냥 오천 원을 더 쓰고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살걸 그랬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버거킹에서 너겟을 먹고 가져온 허니머스터드가 보였다.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 헤무르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몰래 들어온 찬바람이 멋쩍게 웃고 있는 내 뺨을 쓸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