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다.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다 말고 노트북을 덮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몇 장 읽다 그만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선이 자꾸 창 밖을 넘어갔다. 눈길이 멀리 보이는 하늘에 닿았다. 답답한 기분을 털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었더니 맑고 찬 공기가 뺨을 쓸고 지나갔다. 화단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길게 한숨을 내쉬려다 도로 삼켰다. 겨울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하다. 바람이 멎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폈다. 바람은 차갑지만 낮기온은 초봄 같다. 요 며칠 포근했다. 어제는 눈대신 비가 내렸다.
밤부터 겨울비가 쏟아졌다. 자정을 넘기면서 비는 진눈깨비로 변했다. 창문 밖에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구경했다. 그때 잠깐이지만 옛 기억이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멋대로 찾아온 손님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차마 돌아서지 못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서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가는 눈발이 하루살이를 닮았다. 둘의 처지는 비슷하다. 진눈깨비는 반짝이는 비늘을 달고 날아다니다 지면에 닿으면 곧바로 녹아버린다.
소복하게 쌓인 함박눈 위로 겨울날의 추억이 쌓일 때 진눈깨비는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싶지 않아서 계속 모른 척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했다. 떼를 쓰는 아이처럼 제멋대로 굴고 싶은 마음을 확인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티를 내지 않고 지냈다. 늘 그랬듯이 괜찮은 척하고 살았다. 그러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남몰래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체온이 깃든 이불을 도롱이처럼 말고 그리운 순간들로 가득한 꿈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또다시 혼자였다. 다 탄 성냥을 손에 쥔 채 눈을 덮고 잠든 소녀가 된 것 같았다.
공복감을 닮은 공허감을 달래고 하루를 시작한다. 할 일을 하나 둘 하다 보면 금세 저녁이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억을 마주 본다. 어두운 창고 안을 밝히는 백열전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있는 터널을 지났다. 하얀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전만 한 크기의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이제는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내민 손을 마지못해 다시 붙잡았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정말 좋아했던 친숙한 온기를 품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감각은 현실을 구분할 줄 모른다. 더는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여전히 내 것인 줄 알고 착각하고 말았다.
주인이 떠난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긴 그림자만 봐도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마음이다. 이불을 덮으려다 말고 거실로 나왔다. 김치냉장고를 열었다.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둔 김장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맛보면 더 많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한 입도 먹지 않았다.
평생을 먹고살았던 익숙한 손맛이 떠오를 때면 밥을 지어먹는다. 요리가 많이 늘었다. 그럭저럭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는데 유독 김치는 그 맛이 안 난다. 잘 익은 김치를 보자마자 허기가 밀려왔다.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것처럼 헛헛해졌다. 당장이라도 김치를 얹어서 밥 한 공기를 비우려다 그만뒀다.
맛은 타임머신이다. 음악이 지나간 과거로 데려다준다면 음식은 기억에 남은 시절을 눈앞으로 불러온다. 저녁을 차리는 낮고 굽은 등이 어른거리다 금세 촛불처럼 일렁거렸다. 뱃속에 난 구멍을 메우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평범한 날들이 천천히 쌓이다 보면 지금보다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겨울이불솜처럼 풍성한 함박눈이 오면 좋겠다. 하늘 위에서 천천히 내리는 눈송이는 작은 새의 하얀 솜털을 닮았다. 엄마가 정말 좋아했던 함박눈이 보고 싶다. 꽃송이 같은 예쁜 눈꽃을 발견하면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싶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이 참 많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