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함박눈이다. 집에 가다 말고 길에 서서 눈을 맞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밤하늘은 환한 회색빛이다. 눈송이가 볼에 닿았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익숙한 손길이 떠올랐다. 엄마가 좋아했던 함박눈이다. 겨울은 춥고 살기 팍팍해서 싫었지만 함박눈만은 예외였다.
어린 시절 눈이 오는 날이면 엄마 손을 잡고 예향공원에서 같이 함박눈을 구경했다. 늘 입고 다녔던 공장잠바를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엄마는 웃었다. 하얀 얼굴 위로 떠오르는 환한 미소가 눈발 사이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몰래 함박눈을 기다렸다. 유치원을 다닐 무렵의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시간이 지나도 소중한 것들은 처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랑이 깃든 삶은 세월이 흘러도 변질되지 않는다. 변화 속에서도 진심은 늘 살아남는다. 소중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삶이 갖는 가치를 확인한다. 그 사이에서 발견한 사랑은 의미에 확신을 더한다. 그때 내가 받았던 사랑은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 일들을 하나씩 꺼내서 가늠해 본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온기를 담은 말들을 건네고 싶다. 결과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회한이 남지 않도록 눈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버렸다. 그저 조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등을 돌리고 차가운 그림자로 인사를 대신했던 날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꼿꼿했던 아버지의 그림자는 이제 너무 많이 굽어버렸다. 줄곧 대척점에 서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는 진실은 세월이 가르쳐줬다. 얼굴을 마주 보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내가 아픈 만큼 상대방도 아프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꼭 뒤늦게 후회한다. 전하지 못한 진심은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가슴속에 남아있다. 목적지 없이 초원을 떠도는 말을 타고 기억 속을 내달린다. 끝없는 지평선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목적지로 곧장 직진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점점 더 멀어진다.
아쉬운 일들이 떠오를 때면 막막한 기분이 든다. 먹먹해진 가슴을 주먹손으로 두드린다. 눈을 맞는 동안 손 끝으로 때를 놓친 낡은 단어들을 만지작거렸다. 손때가 묻은 모서리는 조약돌처럼 매끄럽게 변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다 집어넣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또다시 기회를 놓쳐버렸다. 수더분해지거나 무던해지기를 바랐지만 나는 여전히 표현이 서투른 사람이다.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중한 가족에게 말을 아끼고 산다. 한 마디가 어려워서 단념하고 돌아섰던 적이 몇 번이나 될까.
결심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 채 매번 내 발치로 돌아온다. 그때마다 한숨을 내쉬면서 서리 같은 고독을 맞았다.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낡은 문을 열고 나온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그때는 못 보고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다.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정답은 모르겠지만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나이 먹을수록 합리화만 는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다른 계절을 맞이하게 됐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내게 거대한 산이었다.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는 든든한 거인이었다.
긴 발자국을 따라 걸었고 커다란 그림자를 덮고 잤다. 지금 아버지는 내 앞에 서리를 이고 서 있다. 그 모습이 익숙하다가도 때로는 많이 낯설다. 이제 거울 속 내 얼굴에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언뜻언뜻 보인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눈구름에 뒤덮여있는 새하얀 설산 앞에 선 굽은 등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