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색감

by 김태민

봄에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식은 3월이지만 곧 신혼집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미리 선물하기로 했다. 그림에 어울리는 액자를 사려고 밖으로 나왔다. 이케아는 너무 멀고 다이소는 맘에 드는 제품이 없어서 가까운 표구사에 들렀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탁자 위에 놓여있는 과일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라탄으로 엮은 바구니 속에 여러 종류의 과일이 담겨있었다. 사과와 샤인머스캣 그리고 천혜향의 색감이 너무나 선명해서 시야에 흐릿하게 잔상이 남았다. 꼭 아크릴 물감을 덧칠한 것 같았다. 노란 망고와 키위는 모형으로 착각할 만큼 모양이 예뻤다. 나도 모르게 바구니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사장님은 선물 받았다는 말과 함께 바구니에서 꺼낸 오렌지를 내게 건넸다. 감사인사를 남기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손에 든 오렌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껍질을 까서 과육을 입에 넣었다. 상큼한 과즙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강렬한 원색을 보면 본능적으로 눈이 반응한다. 오래된 습관인데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나이가 들수록 적록색약이 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지만 색감에 확실히 민감해졌다. 종종 눈에 편한 색을 무의식적으로 찾는 내 모습을 자각할 때가 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색조합을 보고 있으면 피로감을 느낀다. 그래서 편안한 녹색이나 은은한 회색을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됐다.


자극을 덜어내고 무해한 것들만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옷장에 걸려있던 화려한 패턴의 셔츠들은 다 처분해 버렸다. 좋게 말하면 무난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재미없는 옷들만 남았다. 어둡고 차분한 색감의 코트와 재킷에 자주 손이 간다. 단정하게 입는 날은 단색셔츠 위에 짙은 회색 니트를 입는다.


같은 색의 옥스퍼드 셔츠를 돌려가며 입어도 괜찮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봐도 딱히 불만은 없다. 있는 그대로 살아도 상관없다. 훈수와 간섭은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의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이 던지는 평가나 시선을 빨리 버릴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볍게 살고 자유롭게 지내려면 비우는 것이 최선이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계산된 이미지를 더는 갑옷처럼 두르고 싶지 않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테일을 챙기면서 슈트를 고집했던 시절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 많이 낯설다. 심심하고 따분해 보여도 괜찮다. 내가 편해야 행복하다. 하얀 셔츠를 여러 벌 사다가 옷걸이에 걸어놨다.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입을 수 있어서 마음에 든다.


사람으로 인해 지쳐있었던 시기에 회색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희고 검은색으로 구분할 필요 없이 어디든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든 존재. 굳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배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난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떠올려보면 무해한 쪽에 더 가깝다.


익숙함이나 친숙함과는 별개로 무해한 관계를 추구하고 싶다. 비우고 덜어내다 보니 사람에 관한 관점도 달라졌다. 사회생활을 제외하면 가까이 두고 있는 이들은 전부 내게 무해한 사람들이다. 속을 훤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지만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예측가능한 사람들이라 좋다.


복잡한 물음표가 아니라 단정한 문장부호들이 제자리에 놓여있는 관계를 선호하게 됐다. 자극이 주는 짜릿함은 고통과 한 끗 차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모험이나 도박을 하고 싶지 않다. 자극적인 관계는 더 이상 극적이지 않다. 그저 피곤한 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본능에서 비롯된 유희는 일시적이지만 정서적인 신뢰는 오래간다.


안정감을 주는 무해한 것들이 좋다. 의심할 필요 없는 무난함이 좋다. 답변을 고민하면서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좋다. 의미와 의도를 분석하느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좋다. 매일 보는 햇살의 색감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런 자연스러운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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