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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01. 2016

바나나무스케이크

부모님의 변화를 발견하다

 새해를 하루 앞둔 저녁의 거리는 한산했다. 정류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카페에 도란도란 모여 앉은 이들의 표정은 따뜻한 조명과 어우러져 밝아 보였다.‘몇 시간만 있으면 2016년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사거리에 있는 제과점에 들러 케이크를 하나 사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케이크를 사려는 여자 세 명이 진열장 앞에 서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셋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케이크를 고르느라 조곤조곤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옆에 조용히 서서 나는 부모님과 함께 먹을 케이크를 천천히 눈으로 고르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 듯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모카 크림을 듬뿍 올린 초콜릿 쉬폰 케이크, 뽀로로와 타요 같은 캐릭터 장난감으로 장식한 귀여운 미니케이크까지. 다양한 케이크를 하나하나 살펴보다 바나나를 베이스로 사용한 무스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한 조각씩 잘라 먹기에도 적당한 크기였고 무엇보다 귀여운 원숭이캐릭터가‘HAPPY NEW YEAR 2016’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는 케이크 장식이 맘에 들었다. 점원에게 부탁해서 케이크를 포장해서 받아들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며칠 전 작업하다 놔둔 시나리오를 고쳐썼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곧 12시다 축하하자.”라는 엄마의 말에 노트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티브이에서는 재야의 종을 타종하는 모습이 나왔고 새해 복 많이 받자는 인사를 가족끼리 주고받았다. 역시나 올해도 건강을 잘 지키자 건강이 최고야 라는 말이 인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좀 전의 덕담이 무색하게 늦은 시간에 뭘 먹으면 건강에는 안 좋겠지만 그래도 새해잖아 라는 말과 함께 나는 바나나무스케이크를 꺼내놓았다.

 케이크 위의 장식들이 무너지지 않게 정성스럽게 잘라 그릇에 덜어 따듯한 커피를 곁들여 부모님께 드렸다. 부드러운 바나나 크림은 향긋하고 달콤했다. 두텁게 발린 크림 아래 스폰지처럼 폭신한 식감의 빵과 얇게 자른 바나나가 가지런히 자리 잡혀 있는 모양도 아기자기하니 예뻤다. 다만 케이크가 너무 달게 느껴졌기에 케이크를 몇 입 먹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런 나와 달리 부모님 두 분은“달지도 않고 정말 맛있구나.”감상평을 내놓고 케이크를 금세 다 드셨다는 사실이다. 정말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나는 내 몫의 케이크까지 전부 덜어드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예쁜 모양을 하고 있던 바나나 무스 케이크는 깨끗하게 접시 위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릇을 정리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케이크 너무 달지 않았어? 라고 물었다. 엄마는 적당히 달콤해서 요 근래 먹는 케이크 중에 제일 맛있었다며 내게 고맙다고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두 분이 나이가 드셨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단음식이라면 입에도 안대시던 분들이 달콤한 크림이 잔뜩 들어간 케이크를 앉은 자리에서 다 드시는 모습. 변화된 부모님의 모습이 주는 낯선 느낌은 어색함으로 다가왔지만 금세 두 분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무게로 변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내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나는 모르고 지나쳤을 수많은 부모님의 변화들. 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라면서 그동안 놓치고 살았을 두 분의 변화를 나이가 들어서야 이제 하나씩 보게 된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30여 번의 새해를 맞이하는 동안 작고 어린 아이가 어엿한 성인이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두 분은 나의 작은 변화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간직하며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이 들어가는 두 분을 보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변화들을 발견해갈 것이다. 달고 맛있는 음식들을 보면 부모님께 자주 사다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몰랐던 엄마와 아빠의 취향들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두 분의 변화에 잘 맞춰드리고 싶다. 투정부리고 고집 세던 외동아들을 키우며 오롯이 쏟아 부으셨던 관심과 애정을 이제 내가 드려야할 때인 것 같다. 글을 쓰다보니 이태원에 있는 맛있는 디저트 전문점이 생각났다. 내일은 달콤한 에클레어를 예쁘게 포장해서 두 분께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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