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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Feb 26. 2020

퇴근길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운행 지연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스피커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5분 늦게 도착한 열차는 역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스크린도어 바로 앞에 서있던 나는 다음 지하철을 타기로 하고 옆으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쓸려나간 텅 빈 플랫폼. 이어폰을 꽂고 오랜만에 마이앤트매리의 골든글러브를 듣는다. 노래가 끝날 즈음 들어온 서동탄행은 사람이 얼마 없어서 여유로웠다. 퇴근 지하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이다. 퇴근길은 언제나 고단함을 동반한다. 매일같이 똑같은 표정의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을 생각 없이 타다 보면 몇 달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하루는 길고 한 달은 짧고 일 년은 얼마 안 가 작년이 된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   출퇴근이 반복되는 일상은 큰 변화 없이 회전하는 거대한 쳇바퀴와 같다. 쉼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는 한 번 올라타면 마음대로 멈출 수 없다. 그리고 그만둘 수 없을 때 인간은 결국 적응을 한다. 삶은 쳇바퀴의 속도에 익숙해진 햄스터처럼 온순하게 굴러가고 착실하게 집과 회사를 오가는 생활은 계속된다. 평범한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낄 때 종종 소심한 반항을 했다. 퇴근길에 친구를 만나 인기 있는 핫플레이스에 가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다 한 번씩 이유 없이 가슴이 갑갑할 때면 오늘처럼 사람 적은 관악역에 내려 노을을 구경한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서쪽 하늘은 6시 반이 넘어가면 꼭 비행기가 지나간다. 잘 익은 감귤처럼 고운 빛깔의 노을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녀도 출발지와 목적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보면 여기나 저기나 일상의 반복은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퍼즐 맞추듯 끼워 맞추는 공통점이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자판기에서 마시지도 않을 따뜻한 캔커피를 뽑아 손에 쥐고 플랫폼을 따라 걷는다. 노을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롤러코스터나 델리스파이스의 흘러간 노래를 들었다.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는 동안 몇 대의 지하철을 떠나보낸다.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은 노을에 눈길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를 향해 걸어간다. 노란빛의 노을이 점점 붉게 타오르다 구름을 보라색으로 물들일 즈음 벤치에서 일어난다. 이어폰을 빼고 다 식은 캔커피는 브리프케이스 속에 집어넣고 8-4번 플랫폼을 향해 걷는다. 사람도 열차도 없는 지하철역은 자잘한 소음들이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멀리 떨어진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배기음, 건너편의 카페와 호프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이따금씩 하늘로 솟구치다 흩어지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귓가로 밀려드는 백색소음을 들으며 평온함을 느낀다. 시간은 흘러가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다 이내 움직임을 멈춘다. 시간은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오르기 전까지 흐르지 않고 가만히 함께 있어준다. 정적을 깨고 안내방송이 텅 빈 플랫폼 위에 울려 퍼진다. 멈춰있던 시간은 내 느린 걸음을 재촉하고 역으로 진입하는 지하철은 긴 꼬리를 달고 뱀처럼 선로 위를 미끄러지며 지나간다. 평소보다 40분 늦은 퇴근길. 빈자리에 앉아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반쯤 남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고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보면 내릴 역에 도착한다. 승강장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답답하게 뒤엉킨 감정은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별 이유 없이 풀리기도 한다. 이유 없이 맘이 안 좋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선택지가 되기도 한다. 낮은 길고 밤은 짧다. 그리고 낮과 밤을 잇는 저녁은 찰나와도 같다. 평소보다 늦은 퇴근 때문에 소중한 저녁시간을 다 써버렸지만 아쉽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한 번씩은 쉼표가 필요하다. 긴 퇴근길은 쳇바퀴를 성실하게 굴리는 생활에 즉각적인 쉼표가 되어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시간. 목표도 목적도 없는 시간이 주는 자유는 작게나마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로 가득 차 있는 하루.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자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물처럼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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