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방에서

추억의 페이지를 넘기다

by 김태민

만화책 300원, 소설책 800원, DVD 3000원. 커다란 4절 도화지에 손으로 직접 쓴 글씨.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라고 빨간 매직으로 굵게 쓴 단어들은 동네 만화책방의 폐업을 알리고 있었다. 매장 입구 옆에는 노끈으로 묶여 있는 판타지소설 전권세트가 죽 늘어서 있고 출판 된지 오래되어 변색된 만화책들은 과자보다 싼 값에 가져갈 수 있게 돗자리 위에 놓여있었다. 괜찮은 작품이 있나 싶어 책을 뒤적이다보니 머리가 하얀 주인아저씨는 들어와서 둘러보고 가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책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있는 책장들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래된 종이에서 피어오르는 건조한 냄새를 맡으며 빛바랜 만화책의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겨본다. 감각은 언제나 기억으로 이어져있기에 낡은 종이냄새에서 잊고 지냈던 시절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작은 만화책 한 권 속에 담겨 있던 희열과 즐거움.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성장에 공감하고 동화되었던 순간들. 저마다 다른 재미와 매력을 가진 만화책들은 어린 시절의 내게 상상의 세계가 주는 기쁨을 알려주는 스승과도 같았다. 현실을 초월한 세계의 문을 여는 기쁨은 수학문제를 푸는 일이나 긴 영어단어를 외우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즐거움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자라는 직업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상식과 책임을 어깨에 메고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늘 자유롭게 생각하고 또 상상한다. 친구와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에세이의 주제를 발견해내고 별 것 아닌 생활의 풍경에서 일러스트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일들이 품고 있는 메시지와 평범한 삶에 담겨 있는 따뜻한 이미지를 읽어내는 관찰력. 작가로서의 내가 가진 이 능력은 만화적 상상력이 주는 자유로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린 시절 나를 웃게 만들고 또 울리던 그 많은 만화들을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창작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흐의 그림에서 느낀 감동이나 버나드 쇼의 글을 읽으며 얻은 깨달음만큼이나 만화책 속에서 발견한 기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내게 영감을 주는 고마운 창작의 원천이다. 그래서 색이 변한 오래된 만화책을 보면서 나는 익숙한 감동과 기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300원을 주고 만화책을 빌려다보던 아이였던 나는 이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로서 나는 만화를 보며 얻었던 기쁨과 감동을 나의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어려움 대신 친숙함으로, 딱딱함이 아닌 편안함으로 누구나 가볍게 펼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만화처럼 친근한 예술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아이에서 어른까지 모두에게 열린 친절한 예술을 창작하는 작가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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