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계절이다. 뿔테안경을 쓰기 딱 좋은 날씨다. 여름철에도 투명한 컬러의 뿔테안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제철은 역시 가을과 겨울이다. 안경보관함에서 오랜만에 아세테이트 소재의 뿔테 안경을 꺼냈다. 가을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브랜드를 거쳐서 현재는 타르트옵티컬의 아넬 시리즈를 두 점 소장하고 있다. 아넬형 안경의 입문으로 많이 선택하는 모델이다. 안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아넬형 안경을 한 점 이상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같은 아넬형 안경이라도 브랜드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절묘한 디테일의 차이를 쫓다 보면 안경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안경의 매력은 디테일에 있다. 디테일의 맛을 알아가는 것은 패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브랜드마다 리벳을 가공하는 방법이 다르고 소재도 다르다. TVR은 변색 없는 소재로 유명한 SPM 합금을 사용했고 프레임몬타나는 순은을 썼다. 안경다리인 템플에 들어가는 금속 심에 인그레이빙 기법으로 장식을 넣기도 한다. 1950년대의 안경을 그대로 복각해서 힌지를 부정교합으로 제작하는 브랜드도 있다. 섬세한 차이를 잘 살려내는 것이 고급안경브랜드의 매력이다. 특히 안경애호가들은 소재와 디테일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안경을 오래 착용하면서 좋아하게 된 나 역시 안경애호가다. 그래서 금자안경과 TVR의 셀룰로이드 안경을 큰 맘먹고 영입했지만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기존에 쓰던 아세테이트 안경과 차별화되는 장점을 찾을 수 없어서 팔아버렸다. 셀룰로이드가 조금 더 고급소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안경제조사들이 벌이는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다. 화학적으로 볼 때 아세테이트와 셀룰로이드의 카테고리는 합성수지다. 쉽게 말해서 그냥 플라스틱이다. 셀룰로이드는 당구공과 탁구공을 만드는 소재였다. 아세테이트는 합성섬유를 만드는 원료다. 고급소재라고 주장하지만 그냥 흔하디 흔한 플라스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안경 소재로 자일로나이트를 사용한 제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지만 자일로나이트 역시 공장에서 생산되는 합성수지다.
마케팅이 만드는 이미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안경브랜드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장제 합성수지에 희소성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붙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애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셀룰로이드의 영롱한 빛깔이나 깊이 있는 색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차이는 크지 않은 편이다. 안경에 관심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플라스틱일 뿐이다. 패션 아이템의 가격은 재질이나 제조공법보다 스토리와 이미지가 더 큰 영향을 준다. 이런 디테일한 점이 애호가들에게는 차별화된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남들 눈에는 바보 같은 고집으로 보일 것이다. 애초에 취향은 상식을 벗어난 고집의 산물이다. 그래서 패션의 취향이 다양해서 재미있는 것 같다.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이 복식생활의 행복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패션은 취향이면서 동시에 고집이다. 안경을 정말 좋아하는 한 지인은 아세테이트는 플라스틱 같아서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묵직한 셀룰로이드의 무게감과 깊은 색감이야말로 아세테이트와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라고 주장했다. 합성수지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의 취향을 존중했다. 고집의 다른 말은 자기만족이다. 타협할 수 없는 확고한 취향을 갖고 사는 것도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