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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13. 2023

향수로 기억하는 삶

 정말 오랜만에 향수를 샀다. 불가리의 우드에센스는 베이스노트가 참 매력적이다. 우디계열의 향수 중에서 가장  취향에  맞는 제품이다. 풀과 나무의 싱그러운 향기를 형상화한 점이 맘에 든다. 강렬한  향이 사라지고 나면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난다. 연필에서 나는 흑연과 목단의 , 도서관의 책장에서 나는 종이냄새가 생각난다. 향기는 언제나 상상으로 이어진다. 일상 속에 스며든 기억을 불러오거나 몽상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옷과 신발은 시각적인 감각을 즐겁게 만들 뿐이지만 향수는 공감각적인 만족을 주는 아이템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남은 향기가 내게는 향수에 대한 좋은 선례를 만든 것 같다. 아버지의 책상에 놓여있던 스킨과 포마드는 어른의 향을 품고 있었다. 엄마의 파우더리 한 향수냄새 역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어른이 되면 나도 그런 인상적인 향을 갖고 싶었다. 향기는 기억이다. 행복한 기억이 품고 있는 특별한 향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스무 살 인생 첫 향수로 골랐던 불가리 블루는 아버지의 익숙한 스킨냄새와 닮았다. 선명한 머스크 향이 주는 인상을 참 좋아했다. 남자는 누구나 한 번쯤 머스크향에 빠지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강렬한 머스크 향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소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청년이 된다.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뿜어내는 싱그러움은 청춘을 상징하는 느낌이다. 청량감을 품은 시트러스 향은 스포티하면서 활동적인 젊은 남자를 형상화한다. 그래서 캘빈 클라인의 ONE이나 샤넬의 알뤼르옴므를 20대 남자들이 선호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대학시절 두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 은은하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즐기고 싶을 때는 몽블랑의 스타워커를 애용했다. 향수는 옷 위에 걸치는 보이지 않는 옷이다. 향기는 이미지와 아우라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상황에 맞는 옷차림처럼 분위기에 맞는 향기를 통해 감정과 기분을 드러낼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향수를 좋아했다.


 20대를 지나 30대가 되면서부터 나만의 향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패션은 자신에게 걸맞은 이미지를 탐색하고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옷은 취향을 드러내지만 향기는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고요한 언어다. 나에게 어울리는 향을 찾아 헤매는 지루한 시행착오를 한동안 반복했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향기는 처음 접하는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마르지엘라의 재즈클럽은 어지럽고 탁한 인상이었고 톰포드의 오드우드가 내뿜는 강렬함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블루드샤넬이 자아내는 이지적인 이미지는 좋았지만 너무 차가웠다.


 그러다 우연히 키엘의 오리지널머스크를 접하고 빠져들었다. 몇 년간 키엘을 애용했다. 처음 만났던 불가리의 머스크보다 따뜻하고 단아한 향이 정말 좋았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스킨냄새와 어머니의 파우더향이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 그 따뜻한 향은 어른이 된 서른의 내게 주는 일종의 위로였다. 향기는 삶을 기록한다. 행복을 품은 향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추억이 된다. 향을 맡는 순간 언제든지 아름다운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음악과 향기는 시간을 넘어 세월을 건너뛰는 힘을 갖고 있다. 인생의 찬란한 날은 모두 음악과 향기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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