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본질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고민할 때

by 김태민

최선을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사실상 차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 남는 것은 차악과 최악 즉, 두 가지 ‘악(惡)’이다. 이 둘은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장점이 될 만 한 혹은 신뢰가 갈만한 단 하나의 구성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두 악의 차이점이 되는 기준은 악감정과 비호감 정도의 감정적 기호뿐이다. 최악을 피해서 차악을 선택해도 악은 악이다. 형태가 다를 뿐 본질을 동일하다. 본질이 같으면 결과는 비슷하다. 어느 쪽을 골라도 실망을 마주하는 결말을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선이 부재한 시점에서 악을 골라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우리는 좌절을 경험한다. ‘무엇을 선택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좌절을 통해 내면에 자리 잡으면 선택이라는 행위의 의미는 퇴색된다. 한 번이라도 악수를 두는 일이 다음번의 선택에 긍정적인 피드백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최악을 피해 골랐던 차악은 다음번에는 최악이 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고심하면서 변화를 바랬던 간절함이 사라지고 선택의 가치를 망각하게 되는 원인은 여기서 비롯된다. 거기다 선의 영역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악에 물들지 않았던 제3의 선택지는 어느새 차악이 되어 마지막 남은 일말의 기대까지 무너뜨려버린다. 이쯤 되면 선택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가 제 아무리 크다 해도 선택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더 나은 현실을 꿈꾸는 간절함이 외면 받고 혹시나 해서 던진 기대가 비수로 돌아올 때 마음이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악수를 둬야하는 선택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그들을 책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책망과 함께 차악이라도 선택해야한다는 말을 내놓은 사람들 역시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갑갑함에서 비롯된 이러한 외침을 이해한다. 다만, 선택을 포기한 이탈자들을 향한 쓴 소리의 방향은 잘못된 것 같다. 비판이 담긴 화살의 방향은 선택지를 버리게 만든 상황을 야기한 최악과 차악의 진영을 향해야 한다. 선택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한 번 무너져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 시간과 노력에 진정성을 부여하게끔 만드는 진심이 필요하다. 진심을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신뢰는 발아하지 않는다. 선택을 포기한 이탈자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는 건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와 진심 두 가지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최악과 차악이 선택지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선택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이 배제된 선택지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모두 좌절로 귀결된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느끼는 좌절은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패배감이다. 누군가와 맞서 싸운 것도 아니고 힘든 경기를 치른 것도 아닌데 우리는 커다란 패배감을 느낀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의 기분은 몰수패를 당한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승부가 이미 결정된 경기를 뛰는 선수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혼신의 힘을 다한 플레이와 투혼을 발휘한 몸부림이 결정된 스코어를 뒤 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 이제 막 전반전의 휘슬이 울렸을 뿐인데 많은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이탈하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누군가는 소중한 진심을 기만하고 타인의 간절함을 자양분 삼아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이들은 넘쳐난다. 배신은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신의 한수로 여겨지고 명분 있는 폭력은 보기 좋게 미화된다. 그래서 긍정을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아름다움을 파헤쳐내고 발굴해야만 한다. 이 과정은 처절하고 외로우며 때론 괴롭다. 내일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내일보다 먼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다 못해 힘겨운 것이다. 그만큼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은 막막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절망하더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차악은 최악이 되고 최악은 이름을 바꿔 등을 돌린 사람들을 또 다시 미혹하여 배신할 것이다. 그러나 세대는 변화하고 시대는 달라진다. 황금기를 누리는 이들 역시 시간의 흐름 앞에 손에 움켜쥔 것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막막한 현실에도 언젠가 반전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그랬듯 패배감으로 이어지겠지만 흐르는 세월이 악의 선택지들을 영원한 승자가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패배감을 자양분 삼아야 한다. 권리를 버리고 실망감에 사회로부터 등을 돌리더라도 패배의 감각을 기억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선택의 역할을 수행해야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높은 자리는 그만큼 추락하기 쉬운 위치임을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누군가는 실망감에 선택의 권리를 버리고 떠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패배의 자리에서 일어나 변화를 꿈꾼다. 그런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나올 때 우리는 최악과 차악의 선택지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온다. 맹렬한 울음소리와 함께 변화의 불꽃이 발화하면 그 때 우리가 짊어진 패배감을 산처럼 쌓아 태울 수 있을 것이다.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고개를 빼들고 일어나 실패를 승리로 바꿀 기회가 올 때까지 좌절하더라도 포기는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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