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by 김태민

책상서랍을 정리하다 오래전에 사용하던 디지털카메라를 찾았다. 대학생 시절 당시 여자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카메라였다. 기억은 물건에 깃든다. 쭉 잊고 살아서 있는 지도 몰랐던 추억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 당시 인기 있었던 블랙스미스에서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선물을 교환했다. 리본이 붙어 있는 작은 상자를 열었더니 카메라가 나왔다. 웃으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날 입고 있었던 노르딕 패턴의 빨간 니트까지 떠올랐다.


카메라를 발견하자마자 무의식이 기억의 버튼을 눌러버렸다. 지나간 추억들이 자동재생되면서 순식간에 11년 전으로 돌아갔다. 눈앞에 2010년대 초의 풍경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자주 갔던 연남동과 상수동의 골목이 생각났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노래 그리고 계절의 풍경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손대면 순간이동하게 만들어주는 해리포터 속 포트키처럼 오래된 물건은 사람을 과거로 날려 보낸다. 카메라에 깃든 기억은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서랍 속에서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나를 기다렸다.


과거는 모두 추억이 된다.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추억을 아름답게 만든다. 감정은 사라지고 감상만 남는다. 아쉬움이나 미움은 빛깔을 잃고 기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름다웠던 시절과 찬란했던 순간도 모두 그대로 남아있다. 봄날의 한 복판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젊음이라 당연하게 생각했다. 무료하게 이어지는 삶을 벗어나고 싶어서 발버둥 쳤던 시절이었다. 그리워할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떠올리다 보니 그리워졌다. 추억을 돌아보면 어느새 늘어난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낡은 책에서 발견한 바싹 마른 낙엽처럼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잊고 살았던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스쳐간 사람과 기억으로 남은 풍경이 꼭 그림 같았다. 잠시 들여다본 후에 사진을 삭제했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보다 추억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10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지냈지만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얻은 것도 있고 잃어버린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에 만족한다. 추억을 돌아보면서 좋은 기억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멋진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해 가며 살았다. 돌아보니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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