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사회현상을 설명해 주는 훌륭한 지표다
내 기억 속 관리자급 직책을 달고 있던 중년의 남자 직장인들은 투미 백팩을 애용했다. 지퍼가 여기저기 달린 투박한 모양의 투미 백팩은 그 시절 능력을 인정받는 직장인의 상징과 같았다. 강남과 여의도 그리고 판교에 이르기까지 투미를 메고 돌아다니는 직장인들이 정말 많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투미가 아저씨 백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장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투미를 메고 다녔던 차장은 사원들 사이에서 별명이 거북이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비싼 가방이라는 인식이 있다.
투미의 주요 고객은 비싼 가격을 지불할 수 있으면서 브랜드 특유의 감성을 이해하는 남성들이었다. 투박한 디자인은 오래 써도 질릴 것 같지 않았고 묵직하면서 튼튼한 발리스틱 나일론 소재는 품질에 신뢰를 더한다. 국내외 출장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투미 백팩은 폭넓은 수납공간을 제공한다. 디자인은 취향의 영역이고 기능성은 제품의 사용목적에 부합하도록 설계된다. 그런 점에서 투미는 투박하지만 남성적인 디자인철학과 실용적인 성능을 두루 갖춘 훌륭한 가방브랜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브랜드 정체성과 매력은 별개라는 점이다. 투미의 감성은 젊은 연령대의 고객 입장에서는 높은 가격을 지불할 만큼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백화점이나 매장에서 판매 중인 투매백팩은 대체로 80만 원선이다. 가죽소재의 백팩은 출고가가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사회초년생이나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직장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무엇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대에 깔끔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쌤소나이트라는 대안이 존재했다. 쌤소나이트가 투미를 인수했지만 경쟁사였던 과거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투박한 디자인의 투미보다 심플한 쌤소나이트의 인기가 더 높았다. 브랜드의 인기를 결정하는 것은 감성이다. 역사와 전통을 일컫는 헤리티지나 레거시도 감성의 영역이다. 디자인철학과 브랜드가 지향하는 목표 역시 감성이다. 투미의 감성과 특유의 디자인은 마니아들에게 어필하는 경향이 강했다.
2010년대 초반 쌤소나이트는 레드 라인을 출시하면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백팩이나 브리프케이스를 구매하면서 대학생은 사회초년생이 된다. 그러다 보니 쌤소나이트는 젊은 직장인들이 많이 사용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더불어 상위 라인의 쌤소나이트 비즈니스는 이정재나 소지섭을 모델로 3,40대를 파고들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백팩은 정장에도 잘 어울렸다. 쌤소나이트의 브랜드포지셔닝은 한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다양한 연령대의 수요를 만족시킨 결과였다.
2010년대를 지배한 패스트패션의 영향도 있었다. SPA 브랜드들이 전 세계적으로 격전을 벌였던 지난 10년을 지배한 트렌드는 많이 소유하고 질리면 버리는 것이었다. 정말 잘 만든 품질 좋은 제품을 구입해서 오래 사용한다는 발상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대였다. 100만 원 돈을 주고 투미를 사는 것보다 여러 가지 아이템을 사는 편이 나았다. 대중의 시각으로 볼 때 모두가 인정하는 심미성과 브랜드 감성이 있다면 괜찮았겠지만 투미는 그렇지 않았다. 시대의 트렌드나 다수의 시각에서 봐도 가격과 감성 모두 애매한 포지션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투미를 구입하고 열렬한 팬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패션은 본질적으로 자기만족이면서 동시에 지불능력과 만족감이 비례하는 취미생활이다. 내가 좋아하는 특유의 감성은 브랜드의 매력이 되고 높은 가격대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실제로 투미는 국내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브랜드로 이탈하지 않는 편이다. 처음 구입했을 때 느낀 만족감은 재구매로 이어진다. 백팩과 브리프케이스 같이 여러 종류의 투미 가방을 소유한 사람도 적지 않다. 당장 명품 아웃렛의 투미 매장에는 주말이면 늘 가방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원래 대다수의 패션브랜드가 마니악한 면을 갖고 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에 비해 서코니나 아식스를 착용하는 사람은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다. 대중성은 브랜드에 대한 일반적인 선호도로 이어진다. 마니아가 많은 브랜드는 대중의 선호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투미 외에도 높은 가격대와 독특한 감성을 자랑하는 브랜드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투미 백팩이 부장님 가방으로 불리면서 아저씨의 전유물로 취급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짜 부장님들이 투미 가방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백팩족으로 불리는 중년관리직 남성들에게 투미는 일종의 훈장이다. 승진을 하면서 혹은 좋은 성과를 앞두고 면세점에서 투미 가방을 장만했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큰 맘먹고 손에 든 쇼핑백 속의 가방은 그동안 앞만 보면서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주는 훈장이었을 것이다. 튀지 않은 어두운 계열의 컬러는 때 묻지 않고 튼튼하게 오래 쓸 수 있는 신뢰의 색이다. 가방 속 수납공간은 업무 관련자료와 노트북으로 빈틈없이 가득 차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한만큼 중년의 반환점을 돌아 남은 인생도 열심히 가보자는 다짐과 용기. 투박한 거북이 아저씨의 백팩 안에 담긴 바람은 자기 삶에 대한 소박한 애정이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만 해도 투미 백팩을 메고 다니는 관리자급의 중년 남성이 많았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팀장부터 부장까지 투미 가방을 갖고 다니는 직장상사에 대한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다. 브랜드의 정체성은 회사가 만들지만 브랜드의 이미지는 주요 고객층이 만든다. 비즈니스맨을 위한 최고의 가방이라는 정체성에 투미가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지인들에게 투미 백팩이 어떤지 물어보면 별로라는 의견이 많았다. 아무래도 투박한 디자인과 상반되는 높은 가격대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원래 물건을 구입하려면 납득이 필요하다. 투미의 기능성과 편의성 그리고 감성에 설득되지 않으면 가격은 장벽이 될 수도 있다.
투미 백팩을 보고 아저씨 가방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아저씨 같다’는 표현은 나이 들어 보인다는 표면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쓰고도 태가 안나는 매력적이지 않은 물건이라는 숨은 뜻이 들어있다. 남들에게 보이는 자기 모습을 모른다는 핀잔이 따라붙기도 한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취향의 차이가 입장의 차이를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취향저격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싫어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어차피 패션은 자유다.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다.
비싼 값을 주고 산 투미 백팩을 부장님들은 사계절 내내 메고 다녔을 것이다. 실제로 투미처럼 편의성이 좋은 백팩도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똑같은 투박한 백팩을 메고 다니는 아저씨의 모습. 자주 보이는 모습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든다. 옷을 보면 사람이 보이고 유행을 보면 사회가 보인다. 패션은 사회현상을 설명해 주는 훌륭한 지표다. 사람이 사회를 만들고 사람들은 현상인 트렌드를 소비한다. 그래서 트렌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