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은 철저한 자기만족이다
탐미주의자라는 단어는 안경마니아를 잘 나타낸 표현이다. 온라인의 남성복식카페에서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옷환자라고 불렀다. 안경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 역시 비슷한 유형의 환자다. 작은 디테일에 집착하고 감성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헤리티지에 열광한다. 나는 안경환자다. 주기적으로 안경을 교체하면서 지금까지 다양한 안경을 착용했다. 그러나 수집하는 쪽은 흥미가 없다 보니 마음에 드는 안경을 찾아 방출과 영입을 반복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스쳐 지나간 안경이 못해도 서른 점은 넘는 것 같다.
안경을 좋아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좋아하는 데는 사실 명확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자주 눈길이 가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리는 과정을 지나면 취향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러다 적당한 때를 만나면 취향은 만남으로 이어진다. 나는 뿔테안경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저가 플라스틱이 아니라 제대로 된 아세테이트로 만든 뿔테안경을 갖고 싶었다. 20대 초반에 젠틀몬스터의 유행과 함께 시작된 아세테이트 뿔테의 등장은 패션의 판도를 바꿔놨다. 범생이 안경이었던 뿔테가 정체성과 인상을 드러내는 패션아이템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회사 1층 안경원에서 처음 봤던 아세테이트 뿔테안경의 모습이 기억난다. 화려한 톨토이즈 패턴이 들어간 모스콧의 렘토쉬 모델이었다. 진열장 안에서 조명을 받아 빛나는 안경은 값비싼 도자기처럼 아름다웠다. 고급스러운 질감과 매끄러운 광택에 나는 눈길을 빼앗겼다. 3만 원짜리 플라스틱 안경을 쓰던 나에게 30만 원대 아세테이트 안경의 영롱한 자태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안경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늘 한결같았지만 좀처럼 로망을 실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한참 지난 서른두 살의 여름날. 나는 드디어 아세테이트 소재의 뿔테 안경을 손에 넣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모스콧의 렘토쉬를 살까 했지만 나는 첫 뿔테로 언커먼아이웨어의 로저를 선택했다. 갖고 싶었던 모스콧의 렘토쉬나 타르트옵티컬의 아넬보다 월등하게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다. 검은색의 아넬 비슷한 디자인이면 괜찮다는 생각이 컸다. 지금이라면 디테일과 소재 그리고 공법과 마감까지 조목조목 따졌겠지만 그때는 달랐다. 아마도 그 시절의 나는 진정한 안경환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검은색 유광 아세테이트 뿔테안경은 제법 묵직했다. 가벼운 플라스틱테만 쓰다 처음 느껴본 아세테이트 특유의 무게감은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로망과도 같았던 첫 번째 뿔테안경을 잘 쓰고 다녔지만 만족감은 길지 않았다. 자꾸만 다른 안경에 눈길이 갔다. 가성비가 아니라 디테일이 주는 감성에 눈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완성도와 만듦새가 뛰어난 멋진 안경이 정말 많았다. 안경환자 그것도 뿔테에 미친 마니아들은 별 것 아닌 작은 디테일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나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리벳이 달린 뿔테안경이 갖고 싶었다. 안경의 양쪽 끝부분에 달린 금속 장식인 리벳은 브랜드 특유의 섬세한 미의식을 드러낸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무의미한 디테일에 눈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안경환자다.
결국 첫 번째 아세테이트 안경이었던 언커먼의 로저는 반년 만에 사라졌다. 제대로 된 아넬형 뿔테안경을 영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양한 안경제조사들을 찾아서 소재와 공법 그리고 디자인을 자세하게 조사했다. 위시리스트를 만들어서 사고 싶은 안경을 추가하고 빼는 작업을 반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쓰는 열정은 한계가 없는 법이다. 안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서울 각지의 안경점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안경을 써보고 최종후보를 선정했다. 모스콧의 렘토쉬와 타르트옵티컬의 아넬 마지막으로 하만옵티컬의 월리스가 결승전에 올라갔다.
세 브랜드 모두 똑같은 검은색 유광 뿔테 안경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괜찮은 안경을 골라보라고 사진을 보내면 다 똑같이 생겼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차이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안경환자의 세계다. 디테일은 눈이 아니라 감성으로 보는 것이다. 감성이 뇌를 지배하면 별 것 아닌 리벳도 예뻐 보이고 안경의 경첩이 5중인지 7중인지를 놓고 크게 고심하게 된다. 안구를 이어주는 브릿지의 너비와 각도, 안경 끝 부분인 엔드피스의 모양새를 비교하면서 수없이 저울질했다. 긴 고민 끝에 나는 타르트옵티컬의 아넬을 선택했다. 물론 내 안경이 달라졌는지 알아보는 주변 사람은 없었다. 안경은 철저한 자기만족이다.
안경제조기술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아세테이트 뿔테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안경환자들은 여전히 디테일과 감성에 집착한다. 안경이 품은 조형미를 이해하고 즐기는 만족감. 이것이 안경환자들이 안경을 좋아하는 이유다. 자기만족은 도취와 암시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내 눈에 예쁘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에 사람은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다 보면 꼭 갖고 싶다는 욕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암시를 만들어낸다. 견물생심이 꼭 나쁜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욕망과 취향을 설명하는 데 이만한 단어가 없다.
물론 이런 만족감이 변질되기도 한다. 브랜드의 등급을 나누면서 소유자의 경제력을 차별하는 사람도 있다. 안경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늘어놓으며 남을 가르치려는 부류도 존재한다. 저가의 안경을 쓰는 이들을 무시하거나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운운하며 우월감을 뽐내는 인간도 있다. 본인의 취향은 자유지만 타인에게 우월감의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우스꽝스러워진다. 등급을 나눈다고 해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마음에 드는 안경을 찾아 소장하는 만족감 하나로 안경생활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안경을 많이 써보면서 얻은 결론은 취향에도 종착역이 있다는 점이다. 유행을 따라 하금테를 써보기도 하고 마니아들이 인정한 헤리티지 브랜드를 큰 맘먹고 산 적도 있다. 그러나 내 취향을 100% 만족시키는 안경은 주관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안경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나는 최고의 만족을 선사하는 이른바 졸업템을 사기로 했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여러 안경환자들의 추천브랜드는 주로 백산과 금자였다. 백산안경의 린디브로우는 멋진 하금테였지만 내가 쓰면 너무 나이 들어 보였다. 금자안경의 kc60은 베스트모델이었지만 내 기준으로 볼 때 1등은 아니었다. 나는 TVR의 아세테이트 시리즈인 504를 마지막 안경인 졸업템으로 결정했다.
504는 내가 늘 착용하던 아넬형 뿔테였다.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안경을 쓰고 바라본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더 멋지고 비싼 안경들도 많지만 TVR 504만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안경은 없을 것 같았다. 안경환자의 긴 여정은 결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뿔테 안경을 사는 것으로 끝났다. 안경생활은 가장 편안한 내 얼굴을 찾기 위한 탐색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은 계절처럼 달라지고 취향은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멋진 안경을 만나면 또다시 마음에 바람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