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룰로이드처럼

by 김태민

중고장터에서 오래된 뿔테안경을 샀다. 앰버컬러의 셀룰로이드로 만든 타르트의 FDR은 세월이 지나도 영롱한 빛깔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볼드한 디자인의 뿔테안경을 갖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는데 운이 좋았다. 일자로 쭉 뻗은 두꺼운 템플과 완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직각의 프런트까지 내 취향에 꼭 맞았다. 안경은 두 번째 얼굴이다. 아우라는 타고나지만 이미지는 만들 수 있다. 색감이 주는 따뜻함과 디자인에서 풍기는 무심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점이 맘에 들었다.


셀룰로이드의 색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변색에 불과하다. 감성을 가지고 보면 변색도 에이징으로 포장할 수 있다. 손때 묻은 오래된 가죽의 변색을 파티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셀룰로이드의 장점은 색감보다 강성이다. 대중적인 소재인 아세테이트에 비해 좀 더 단단한 편이다. 그래서 셀룰로이드 안경은 쉽게 틀어지거나 늘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셀룰로이드는 더 단단하게 굳는다. 몇몇 안경브랜드는 제조공장에서 오래 숙성된 셀룰로이드를 사용한다고 한다.


숙성 과정을 거치면 셀룰로이드의 강점은 극대화된다. 목재의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로스팅하거나 건조하는 것과 비슷하다. 숙성 셀룰로이드를 사용하면 변형이 거의 없는 안경을 제작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약이 될 수는 없지만 세월이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무의미한 시간낭비는 없다. 시간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삶의 대부분은 무료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변은 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생하고 변화는 축적된 경험 속에서 비롯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숙성의 시간을 거친다. 다만 마음가짐에 따라 현상을 대하는 온도가 나뉘게 된다.


숙성기간을 변화와 발전 없는 정체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고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휴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상황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는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정체기의 결말은 하락이지만 휴지기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숙성을 거쳐 단단해진 셀룰로이드는 시련을 이겨내고 삶의 성숙기에 접어든 사람과 닮았다. 그런 사람은 항상 당당하다. 비굴하게 굴지 않고 늘 바른 길을 추구하며 마음의 심지가 곧은 만큼 쉽게 꺾이지 않는다. 삶에 맞서 승리한 사람은 온화한 겉모습과 강인한 내면을 동시에 갖게 된다. 따뜻한 색감과 튼튼한 강성을 가진 셀룰로이드처럼 외유내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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