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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24. 2024

다시 스피드캣이 돌아온다

 2000년대 중반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패션암흑기는 재해석이 금기시된 시대였다. 이 시대가 낳은 유행의 산물을 리스펙이나 오마주라는 이름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 다시 봐도 나사가 완전히 빠진 시대였다. 2000년대 중반은 시대를 지배하는 미의식이 오류를 일으켰던 시기다. 본격적인 세계화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밀려들어왔고 90년대를 이끌던 X세대가 30대가 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새천년은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인 상식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관습이 폐습으로 치부당하면서 너도 나도 새로운 변화에 대한 목소리를 냈던 시대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할지 몰랐다. 처음은 누구나 서투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패션은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해괴한 꼬락서니를 만들어냈다. 스타일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았던 만큼 일본이나 미국의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두 가지가 섞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왔다는 점이다. 머리스타일은 주로 일본 무드가 강했고 옷은 반반이었다. 누가 입어도 어색했고 누구에게 입혀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시대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꼽히는 셀럽이나 스타들의 스타일링은 시간이 지나도 진보적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의 한국 패션계는 별들의 무덤이었다. 그 누구도 암흑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0년이 흐르는 동안 어느 누구도 재해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건질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구글링 해보면 돈을 줘도 입고 싶지 않은 이상한 스타일만 가득하다. 그물나시에 카고바지가 인기를 끌거나 샤기컷을 한 남자들이 랄프로렌의 피케셔츠를 입고 덩크를 신었다. 버스 손잡이처럼 큰 링귀걸이가 불티나게 팔렸고 빵모자와 로우라이즈 팬츠 그리고 아디다스 저지가 사랑받았다. 암흑기는 흑역사를 만든다. 2000년대 초중반의 패션은 스타일에 관한 최악의 사례만 모아놓은 집합소다. 7년 넘게 장기집권한 암흑기는 트렌드를 집어삼키면서 점점 더 기괴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아이돌들은 니트 소재의 팔토시와 머플러를 나시에 코디하고 나왔다.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한 스타일이 난무했다. 타입원 부츠컷에 티셔츠와 베스트를 코디한 남자스타일이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기괴한 시대였다. 스타일을 표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강약조절이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그때는 상식이 아예 없었다. 개성과 정체성을 누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지 경쟁하는 시기였다. 강렬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일본스트릿 브랜드나 펑크무드가 강했던 비비안웨스트우드가 사랑받았던 이유가 있다. 수학여행과 수련회를 물들인 강렬한 원색옷의 행렬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스케이드보드 문화와 힙합까지 섞이면서 패션계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난세도 이런 난세가 없었다. 마라탕에 타바스코 소스를 추가하고 토핑으로 캡사이신을 뿌린 것 같은 시대였다. 어디에서도 중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밀리오레로 통하는 동대문 보세패션과 온갖 디자인을 도용한 인터넷쇼핑몰이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다. 결과물은 끔찍하다 못해 처참했다. 다들 돈을 주고 흑역사를 사 입었다. 패션은 자유로운 표현이다. 금기도 없고 금지된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심미안을 갖고 있다. 상식적인 미의식을 한참 벗어난 스타일은 누가 봐도 이상할 수밖에 없다.


 알록달록한 컬러의 패딩에 콘돔비니를 뒤집어쓴 대학생들이 홍대거리에 가득했다. 보잉 선글라스에 본더치 로고가 들어간 트러커캡을 쓴 형들은 말 끝마다 간지를 운운했다. 가오가 정신을 지배하고 간지가 모든 것을 합리화했던 시대였다. 100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는 트루릴리전의 강렬한 스티치. 그 아래 보이는 페디큐어와 웨지힐. 그 시절의 미의식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한데 모인 부조화가 미의식을 지배했다. 하얀 골지 나시에 부츠컷을 입고 푸마 스피드캣을 신은 남자들이 강남거리에 한 트럭이었다. 수염을 기르고 해골비니에 팔찌와 반지를 자랑하는 스타일도 흔했다.


 90년대 스타일이 주목받고 Y2K룩이 트렌드가 되면서 2000년대 암흑기 스타일도 재조명받을 것 같다. 20년 가까이 버려져있던 시대가 새로운 재해석을 앞두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뜬금없이 비니가 유행하고 노스페이스 눕시가 인기를 끌었다. 서리를 보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라는 말이 생각났다. 전조가 이어지다 보면 재앙이 다가온다. 푸마의 스피드캣이 재출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성장의 불황이 시대를 뒤덮을 때 유행은 거꾸로 간다. 본더치 트러커캡을 쓰고 리바이스 타입원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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