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치프 전시를 관람하고 나와서 미술관 주변 골목을 둘러봤다. 화려한 포스터로 장식된 담벼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담장 너머에 핀 매화에 눈길이 닿았다. 가루비가 내리는 잿빛 하늘과 대비를 이루는 새하얀 꽃잎이 참 고왔다. 물기를 머금은 매화나뭇가지는 섬세한 붓으로 그린 것처럼 가늘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서 꽃이 핀 미술관 뒤뜰로 들어갔다. 꽃잎을 돌돌 말고 있는 꽃망울은 연한 분홍빛이었다. 약지 손톱만 한 작은 꽃잎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봤다. 생화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길 가에 서있는 가로수들은 가지마다 새순을 달고 있다. 밤사이 짧게 내린 봄비가 신호였나 보다. 담장 아래 덤불 위로 개나리가 보인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산수유는 일찌감치 봄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거짓말처럼 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기다렸던 봄이 왔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살짝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느다란 햇살이 내려앉았다. 코트를 벗고 이제 재킷을 꺼내 입어도 될 것 같다. 봄은 짧다. 갑자기 찾아와서 잠시 머물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꽃샘추위로 마지막까지 존재감을 과시하는 겨울이랑 다르다.
봄은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질 때마다 한 걸음씩 멀어진다. 낮이 점점 길어지다 보면 여름은 봄의 영역을 당당하게 침범한다. 봄은 아무런 미련 없이 여름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꽃과 함께 진다. 올봄도 늘 그랬듯이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짧아서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짧아서 참 아름답다. 봄날에 만든 행복한 추억은 선명한 기록으로 남는다. 추억은 색이 바래지 않는 사진이다. 소중한 것들은 사라지거나 잊히지 않는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봄에 만드는 것이 좋다. 봄에 만난 사람과 평생 동안 함께한다는 말도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충훈벚꽃축제를 홍보하는 현수막을 발견했다. 따스한 봄날 화사하게 핀 새하얀 벚꽃을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올해는 부디 축제 기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중호우에 가까운 폭우로 인해 꽃이 모조리 떨어졌을 때는 정말 속상했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실망이 컸다. 방금 한 달 치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역시나 비 소식이 많이 보였다. 성난 폭우 대신에 부드러운 봄비가 오기를 기도해야겠다. 벚꽃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이 하늘에 닿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