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실망을 넘어 이제는 통합으로
80년대 태생인 나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성장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였다. 국민 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초등학교의 졸업생이 되었고 게임팩을 꽂아 즐겼던 전자오락은 PC방의 등장과 함께 온라인 게임으로 대체되었다. 집집마다 놓여있던 유선전화가 무선전화로 교체되었고 버스 탈 때 내던 회수권은 교통카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테이프를 갈며 듣던 소니 워크맨은 MP3로 전화선을 꽂아 쓰던 PC통신은 무선인터넷으로 그리고 전화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던 핸드폰은 스마트폰에게 자리를 내줬다. 바뀔 것 같지 않았던 국민소득의 앞자리가 올라갔고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에 근접하면서 마침내 한국은 선진국이라는 이름표까지 달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큰 성과를 내기 위해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풍토는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다. 기존의 것을 모두 부정하고 변화만을 강조하는 유명 대기업의 혁신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는 총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효과성과 효율성이 당위성을 대체했고 윤리와 원칙은 발전의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 정도로 취급당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막대한 이윤이 발생했다면 불법은 지혜로 편법은 성공신화로 보기 좋게 포장 당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회의 발전을 나타내는 지표는 상승곡선을 그렸지만 사회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나타내는 지표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부패하지 말아야할 것들이 부패했고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대체되었다. 한국 사회는 몸집을 불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실을 다지는 데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회가 되었다.
사회발전을 통해 우리가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급속하게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양적 성장이 행복이라는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확대 시켰는지는 미지수다. 양극화는 성장곡선과 반대로 갈수록 심화되었으며 사회계층 간의 반목과 갈등은 위험한 지경에 도달했다.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적인 가치들이 붕괴되면서 공익적인 기본권보다 현실적인 이익이 더 값진 것으로 대접받았다. 그럼에도 사회를 이끄는 지배계층과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할 지식인들은 문제를 인지하면서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문제해결능력과 뛰어난 역량은 본인들의 지위와 소득을 올리는데 소모되기 바빴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의 비리와 이름 있는 대학의 교수들이 저지른 패악에 대한 뉴스를 우리는 해마다 아니 분기마다 접했다. 국가적인 비리와 범죄를 확인하는 일은 하나의 일상이 되었고 떡값, 비자금, 사과박스라는 이음동의어들은 국가의 부패를 나타내는 병명처럼 느껴졌다.
차곡차곡 누적된 사회의 부패는 뿌리 뽑기 힘든 질병이 되었고 쇄신과 혁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환영받지 못하고 단지 평가받았다. 먹고 사는 일이 급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바뀔 것 없는 사회의 부패에 눈을 감았고 변화를 선도해야할 지배계층은 귀를 닫았다. 지배층에 대한 분노는 실망감으로 그러다 마침내는 무관심으로 귀결되었다. 국민들의 무관심을 확인하자 부패는 변화와 성장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기업은 사람을 갈아가며 실적을 달성했고 국가는 치적이 될 만한 성과를 쫓는 데 급급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청춘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찾아 꿈을 버렸고 높은 연봉을 보장하는 기업이라면 사람들은 비리가 들끓어도 입을 다물었다. 미디어는 남들처럼 남들만큼 살고 싶은 욕구를 부추겼고 마침내 사회는 갈등하고 배척하면서 부패해린 공동체 아닌 공동체가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헌법적인 원칙과 사회적인 통념이 붕괴되는 최순실 사태가 발생했다. 근본적인 질서가 부정당한 현실을 목격하고 생업만을 쫓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났다. 백만에 가까운 인파가 광화문에 집결했고 사회 각계각층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며 한국 사회의 병폐와 부패가 극에 달했음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통단했다.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 이게 나라냐 라는 말이 나왔고 잘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아무 상관없다던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동시에 패배감을 느꼈다. 한국 사회의 극에 달한 부패를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을 넘어선 특권층의 횡포는 개인의 노력과 성실함이 무가치함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분노는 광범위하면서 동시에 뿌리 깊었다.
민주주의는 ’약속‘이다. 국가와 국민이 동등한 주체로서 서로를 보완해가며 상생한다는 약속이다. 그런 약속의 근본인 신뢰가 깨진 시점에서 한국 사회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순실 사태는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실패라고 봐야한다. 공정한 절차는 무시당했고 정당한 권리는 배제 당했다. 개인에게는 잔인할 만큼이나 철저한 법질서가 특권층에게는 솜털처럼 가벼운 것이었다. 차등과 차별이 당당하게 존재하는 현실을 목격한 국민들은 이제 국가에 어떤 기대도 품지 않을 것이다. 신뢰감을 잃은 관계는 회복될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러한 치욕적인 사회실패의 원흉인 특권층이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을 것임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 뿌리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이파리 몇 개만 뜯고 청산을 외쳤던 과거가 한국의 역사에 수두룩하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철저하게 반복된다. 피 끓는 공분을 토해내며 광화문에 모인 이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나는 두렵다.
언제나 그랬듯이 피와 땀은 아래에 위치한 이들이 뿜어내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는 치욕적인 역사로 기록될 최순실 사태의 뒤처리를 하는 데 동원될 지도 모른다. 대대적인 혁신을 외치며 단행될 개혁을 통해 허리띠를 졸라 매고 변화를 강요받을 대상은 국민일까 지배층일까? 지역과 이념 지연과 학연 등으로 편을 가르던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는 합심하는 것을 보면 과연 우리 사회가 부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뿌리까지 완전히 썩은 시점에서 국민만 피땀 흘리는 반쪽짜리 노력을 통해 사회가 정화될 수 있을까? 국민적인 신뢰를 상실한 국가가 과연 국민을 위해 자신들의 수족을 잘라내고 뼈를 깎고 살을 찢는 개혁을 단행할 수 있을까? 역사는 현실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꼬리를 잘라내고 기사회생했던 권력층의 행태를 한국 사회는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의 지배계층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런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니 해야만 산다.
비리를 고발하고 불공정한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부패에 맞서야 한다. 이길 수 없는 적을 이기기 위해 싸우는 비극적인 모양새지만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으면 제 2, 제 3의 최순실 사태를 또 겪을 지도 모른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만 믿고 우리는 올바른 것을 멀리하며 살아왔다. 물론 대다수의 국민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초법적인 특권층과 지배계층이 저지른 불법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지금까지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에 너무나 인색했다. 비민주적인 압재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이 세월 앞에 희석되고 괄목할만한 성장에 도취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는 좋은 것이 아닌 옳은 것을 수용하는 쉽지 않은 도전을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국가라는 보호막을 상실하고 우리 국민들은 지금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제 스스로 구원해야할 입장이 된 국민에게 남은 것은 통합뿐이다. 반목과 갈등은 접어두고 합심해야만 한다. 이마저도 쉽지 않은 과제겠지만 하나 되어 견제하지 않으면 국민은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초법적인 특권계층에 의해 노예로 전락할지 모른다. 편 가르기는 끝났다. 지금 분노하고 있는 국민이라면 모두 하나다. 그렇게 하나로 합쳐야 우리가 된다. 우리의 살길을 이제 우리가 개척해야만 한다. 더 이상 기대하지 말고 이제는 행동해야한다. 봄이 와야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면 봄이 되는 것임을 보여줘야 한다.
*첨부그림
꽃피는 봄이 온다, 17.5 x 24.5cm, 카드보드에 오일파스텔,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