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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0. 2024

감정의 쓰레기통이 뒤집어질 때

사람을 이용하고 관계를 악용하는 이중인격자

 감정의 쓰레기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약한 내면을 갖고 있다. 대외적인 모습은 친절하고 멋진 사람이다. 그러나 속은 낮은 자존감과 부끄러운 죄책감으로 어지럽다.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고 타인의 평가와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혼자 견디기 힘들지만 주변에 토로할  없다. 애써 만든 이미지와 좋은 평판에 오점이 생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비밀이 새나갈 염려도 없고 언제든 끊어낼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탐색한다.


 정서적으로는 가깝지만 소중한 사람의 범주에는 들어오지 않는  나지 않는 인간. 그런 사람을 찾아서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는다. 주변 사람들은 살뜰하게 챙기지만 쓰레기통은 챙길 필요가 없다. 힘들 때만 찾아서 답답한 마음과  좋은 감정을 토로하고 쓰레기통의 뚜껑을 닫으면 그만이다. 사람을 이용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없다. 상대방이 이용당했다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면 상관없다. 가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말뿐인 호의를 사용료로 생각하고 던져준다. 그러나 정작 상대가 친근함을 표시하면 선을 긋는다.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현실의 인간관계 안으로 들일 수는 없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만큼 언제든 뒤돌아보지 않고 관계를 끊어낼  있어야만 한다. 감정의 쓰레기통은 사람이 아니라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선을 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정의 온도차를 둔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애정을 남발하지만 쓰레기통은 예외다.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상이 아니다. 감정의 쓰레기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저 이중인격자일 뿐이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이미지를 입고 사회생활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도구삼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이중인격자들은 가면이 본체다. 애초에 얼굴이 없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교체하거나 늘려나간다. 본인의 나약한 정신과 빈약한 내면을 감추고 억제하기 위해서는 쓰레기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중인격자는 겉으로 보이는 좋은 이미지와 상반되는 일을 저지른다. 발각되면 사람들에게 지탄당할지도 모른다는 부채감에 휩싸인다. 이때 필요한 것은 반성과 인정이 아니라 쓰레기통이다.


 본인은 고해성사쯤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마약에 의존하는 약쟁이와 다를  없다. 이중인격자의 인생을 유지하는 기둥은 결국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입에 사랑한다는 말을 달고 사는 가까운 이들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준다. 더러운 치부나 과거를 공개할  없으므로 인간관계는 피상적이다. 그럴수록 표면과 이면의 괴리는 커진다. 쓰레기통만 있으면 부담감이나 죄책감은 모두 털어버릴  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밝은 모습만 보여줄  있다. 그러나  고민과 비밀을 들어주는 순진한 쓰레기통은 호구가 아니다.


 마음을 살짝 바꾸기만 하면 그들은 이중인격자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돌아서는 순간 그들은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된다. 치부가 가득한 이중인격자는 속수무책으로  놓고 당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한 자는 언제나  수단에 의해 무너진다. 칼로 흥한 자가 칼로 망하듯 사람을 이용한 자는 사람에게 돌려받는다. 근본적으로 이중인격자들은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나에게 매혹당한 쓰레기통이 자신을 거역할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수명을 갖고 있다. 상호 간에 친분과 애정이 있다면 수명은 길게 유지된다. 하지만 제대로 존중해   없는 감정의 쓰레기통은 다르다.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인내심에 금이 가는 순간 상황은 급변한다. 쓰레기통 안의 더러운 비밀은 뒤집어지면서 이중인격자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털어놓는 쪽은 수많은 정보를 생각 없이 발설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은 누가 봐도 추잡한 치부다. 이야기에  기울여주는 공감능력과 배려하는 이해심을 갖고 있는 인간은 쓰레기통이 아니다.  듣는 사람은 누구보다  말할  있다. 마음이 돌아선 그들이 입을 여는 순간 이중인격자의 본모습은 백일하에 드러난다.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서지만 역부족이다. 설명을 해도 소용없고 해명을 해도 듣는 사람은 없다.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마디 되지 않는 짧은 문장이지만 파급력은 상상이상이다. 좋은 이미지를 관리하면서 만든 사람들은 하나  거리를 둔다. 심혈을 기울여 가꾼 겉모습이 아름답고 완벽할수록 이중인격자의 이면은  추악해 보인다. 겉과 속이 다를수록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다들 겉으로는 걱정해 주는 척을 하겠지만 등을 돌리게 된다. 정말 가까운 사람들은 응원해 주겠지만 상황을 수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폭로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중인격자에게 사회적인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고발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중인격자가 악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치부하면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비밀과 치부를 털어놓는 쪽은 아무것도 없다. 칼자루는 언제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쥐고 있다. 한국은 땅덩어리가 좁다.  세명만 건너면  명쯤 엮이기 마련이다. 말은 발이 필요 없다.  마디만 던지면 말은 날개를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을 몰고 온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없다. 인과응보는  사람을 통해 찾아온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한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인간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는 이중인격자들의 최후는 외로운 고립이다. 그러나 동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사람을 이용한 자는 사람으로 망한다. 사필귀정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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