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우울할 때 나는 마트에 간다. 평일 낮시간은 사람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서 적당한 활기가 돈다.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세일코너로 직행한다. 특가세일 상품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계획적인 소비를 해야 하지만 세일 앞에서 충동구매를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늘은 딱 하나 남은 충주복숭아를 반값에 샀다. 삶의 작은 행복은 역시 마트에 있다. 느린 걸음으로 카트를 끌면서 가공식품 진열대를 살펴본다. 시리얼 상자를 손에 들고 뒷면의 성분표를 확인한다.
나는 가공식품 포장지 뒷면의 성분표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마트에 오면 성분표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똑같아 보이는 과일주스도 과채주스와 과채음료로 유형이 나뉜다. 특가세일 딱지가 붙은 초코우유는 정제수와 분유로 만들었다. 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 우유팩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원유와 가공유는 천지차이다. 식품성분표는 마케팅의 그늘 아래 숨은 진실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훈제오리가 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추리소설 뺨치는 반전과 트릭이 숨어있다.
친환경을 내세우는 제품들은 예외 없이 복잡한 이름의 화학첨가물이 들어간다. 맛과 건강을 모두 잡았다고 광고하는 식품은 맛도 애매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성분표를 속일 수는 없다. 진상을 밝히는 미스터리 소설의 즐거움을 마트에서도 느낄 수 있다. 성분표에서 눈길을 돌려서 미리 작성해 놓은 쇼핑목록을 확인한다. 굴소스와 두반장을 사려고 했는데 운 좋게 세일 중인 상품을 발견했다. 신나게 휘파람을 불면서 카트에 담았다. 원하는 물건을 좋은 가격에 사는 기쁨은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꼭 쇼핑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평일 오후 마트의 적당한 활기와 편안한 속도감이 좋다. 저녁시간이나 주말오전을 제외하면 적당한 평온함이 감돈다. 카트를 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느긋하다. 걱정이나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행사상품이나 특가상품을 구경하면서 원가나 마진을 생각해 본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쓸모없는 걱정과 불안을 밀어낸다. 매장에 흘러나오는 로고송을 흥얼거리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마트는 쓸데없는 걱정거리나 이유 없이 밀려오는 불안을 비우기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