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냉면 먹기 참 좋은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보다 볕이 좋은 봄가을에 먹는 평양냉면이 더 맛있다. 밍밍하고 심심한 맛은 은은한 수묵담채로 그린 동양화를 닮았다. 강렬한 원색의 대비나 인상적인 화풍은 찾아볼 수 없지만 자꾸만 눈이 가는 그림 같다. 맑으면서도 진한 감칠맛을 자랑하는 평냉이 한 번씩 이유 없이 먹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즐겨 먹는 음식은 아니지만 갑자기 생각나면 맛집을 찾아 나서게 된다. 정크푸드를 자주 먹다 보면 본능적으로 건강한 음식을 찾게 되는 것처럼 몸이 반응한다.
설렁탕이나 꼬리곰탕에서 느낄 수 없는 감칠맛은 평양냉면의 강점이다. 맑은 육수는 혀끝을 적시면서 풍부한 향을 끌고 들어온다. 천천히 목으로 넘어가면서 소고기가 품고 있는 깊은 풍미를 선사한다. 봄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꽃이 피는 것처럼 감칠맛이 입 속에서 만개한다. 밍밍한듯하지만 착 달라붙는 간간한 맛이 부드럽게 입 안을 감돌면서 산뜻하게 마무리된다. 뜨끈하게 즐기는 탕의 육향과 대비를 이루는 차가운 평냉의 매력은 은은한 잔향이다.
을지로와 낙원동에 살다시피 했던 20대 시절. 전시회를 보고 나서 종종 을지면옥을 찾았다. 낡은 간판을 달고 있는 오래된 가게 특유의 편안함이 좋았다. 전파사와 철물점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 종로극장 건너 오래된 거리의 풍경이 생각난다. 지금은 힙지로가 됐지만 그 시절 을지로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사람이 몰리는 점심시간을 피해 느지막이 들어가서 평냉 한 그릇을 주문한다. 추운 계절이 되면 뜨끈하고 구수한 면수가 냉면만큼이나 반가웠다. 냉면 먹는 순서는 습관처럼 정해져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냉면이 나오자마자 그릇째 들어서 국물을 한껏 들이마신다. 기름기 하나 없이 깔끔한 육수가 혀 끝을 감싸고 소고기의 풍부한 육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기분 좋은 감칠맛을 느끼고 감탄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고명으로 올라간 편육과 삶은 계란을 먹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면을 즐길 차례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려서 한 입에 밀어 넣으면 은은한 메밀향이 부드럽게 감겨들어온다. 톡톡 끊어지는 식감이라 면이 품고 있는 향이 더 잘 느껴졌다. 고구마 전분이 들어간 질긴 냉면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몇 번 씹으면 잘려나가는 메밀면이 좋다.
반찬으로 나오는 무절임은 면을 다 먹고 나서 마무리하는 입가십이다. 새콤하고 달콤한 맛으로 메밀향을 살며시 씻어낸다. 절반쯤 남은 육수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텅 빈 그릇만 남는다.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행복감을 만끽한다. 평범한 냉면 한 그릇이지만 평양냉면이 주는 만족감은 독보적이다. 심심함과 간간함 사이의 미묘한 맛이 주는 평냉의 매력은 한 번 빠지면 벗어날 수 없는 마력을 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대체로 대체재가 없다. 그래서 한 번씩 생각나면 참지 못하고 냉면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된다.
9월로 접어들면서 해질 무렵이 되면 늘 선선한 바람이 분다. 30도를 훌쩍 넘겼던 한낮의 열기가 식었다. 평양냉면이 생각나는 계절이 왔다. 미식생활을 즐기는 친구와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가오는 주말에 오랜만에 낙원동을 찾을 예정이다. 벌써부터 눈에 익은 익숙한 골목 풍경이 눈에 아른거린다. 맛은 지나간 기억을 정겨운 추억으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