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대체재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불황의 이미지

by 김태민

오래된 미용실이 문을 닫고 떠난 자리에 인형뽑기전문점이 새로 들어왔다. 번화가를 가득 채우고 나니 이제는 작은 동네의 골목으로 들어오는 모양이다. 밝은 조명 아래 벽면을 가득 메운 여러 대의 기계 속에는 갖가지 캐릭터 인형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게 안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저마다 모여 어떤 인형을 뽑을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뽑기 어려운 커다란 인형을 뽑게 되면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이변의 주인공에게 주변 사람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작은 인형을 몇 개씩 뽑아 손에 든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보였다. 라이센싱도 받지 않았을 중국산 봉제인형 하나가 주는 행복은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들까지 인형을 손에 든 이들은 트로피를 거머쥔 선수처럼 행복해보였다.

아주 오래전 나는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본 기억이 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한국은 IMF의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대기업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두툼한 생고기가 아니라 냉동 대패삼겹살이 히트를 쳤고 결식아동이라는 단어가 뉴스에서 일상으로 들어왔다. 근심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위로나 기쁨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 그 때 인형뽑기가 등장했다. 인테리어 장식 하나 없는 점포 안에 놓여있는 기계 속에는 조악한 품질의 중국산 인형들이 가득 가득 차 있었다. 100원을 넣으면 요란한 테크노 음악이 나오던 것을 기억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동전을 쌓아놓고 인형을 뽑는데 열중했다. 집에 가져가면 왜 이런 걸 뽑았냐는 잔소리를 들을게 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들 인형을 뽑는데 집중했다. 등산용 바지와 낚시 조끼를 걸친 아저씨들이 인형뽑기가게와 오락실을 가득 채웠던 시절. 팍팍한 삶에 작은 성취감을 느끼게 만든 인형뽑기는 힘든 시절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위로의 대체재로 기억에 남았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 남을 20년이 흘렀음에도 다시 인형뽑기가 유행하고 있는 걸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과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 다는 말이 떠오른다.

암울하고 갑갑한 현실에 대항할 수 없는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작은 기쁨을 주는 것들에 시간과 비용을 쓴다. 인형뽑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위로의 대체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인형뽑기를 비롯해 불황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몇 가지 생각난다. 여자들의 새빨간 레드립. 박리다매를 내세운 저가 음식점. 역경을 딛고 부유한 배우자를 만나는 드라마속의 당찬 성격의 여주인공. 초벌구이 되어 나오는 9900원 삼겹살집이나 3000원대의 안주를 파는 술집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요즘. 주말드라마와 일일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씩씩한 캐릭터인 것을 보면 불황이 삶에 깊이 스며든 느낌이 든다. 버건디 컬러가 강세를 보였던 몇 년 전의 트렌드가 이제는 하나의 클리셰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 또한 불경기가 지속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경기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청년실업은 사회현상을 넘어 이제 사회문제가 되었다. 산업성장기동안 땀 흘려 일한 중장년층은 빛나는 은퇴 대신 불안한 노후에 직면했고 아이들은 어느 아파트에 사는 지에 따라 사회적인 차별을 일찌감치 경험한다. 국민들의 정서적 구심점이 될 만한 가르침은 사라진지 오래고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커다란 학원으로 변해버렸다. 몇 년 새 삼포세대는 N포세대가 되었고 밝지 않은 전망에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노량진과 신림으로 쏠렸다. 삶은 팍팍하고 생활은 각박하다. 불안 속에 내일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고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의 가치가 삶의 목적으로 격상했다.

이런 현실에 크게 저항할 수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소소한 만족을 주는 것들을 통해 그나마 작은 위안을 얻는다. 동전 몇 개로 뽑을 수 있는 인형이나 무한리필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저렴한 식사. 힘든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적적인 드라마속의 이야기. 그리고 고단한 삶을 토로하는 두어 줄짜리 짧은 시까지. 본질과 깊이보다 순간의 만족에 가까운 것들이 사랑받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부족하기에 저렴하고 간단한 것들로부터 위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생활의 여유 대신 생존의 이유가 삶 속을 파고든 시점에서 만족과 성취를 통해 누리는 기쁨은 사라졌다. 집으로 가져가면 아무 쓸모없는 인형을 뽑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작은 기쁨을 느끼고픈 바람이 스며들어있다. 역사의 반복에서 보듯 불황은 결국 지나갈 것이다. 사회적 환경이 앞으로 질적으로 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양적인 측면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부의 상징이었던 핸드폰을 누구나 다 들고 다니게 된 것처럼. 다만 힘든 시절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만 사회적 차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의 이미지들이 희망고문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현실은 위기의 극복을 말하기에는 아직 어두운 것 같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값싼 위로의 대체재들이 채우고 있는 지금. 불황의 긴 터널을 벗어나는 출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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