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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Oct 22. 2024

돌고 돌아 다시 검정뿔테

 돌고 돌아 다시 검정뿔테안경으로 돌아왔다.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마음이나 취향도 변한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두꺼운 뿔테안경에 눈길이 갔다. 가끔 시간이 나면 중고장터앱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친구 안경을 골라주러 더현대에 갔다가 확신이 섰다. 안경을 사기로 결심했다. 중고거래로 저렴하게 미개봉품 금자안경을 샀다. 받자마자 렌즈를 맞추고 피팅까지 끝냈다. 거울 속에 까만 뿔테를 쓴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코에 닿는 적당한 무게감, 시야 외곽의 뚜렷한 경계선, 쓰고 벗을 때 머리카락을 스치는 촉감. 몸이 기억하는 익숙한 감각이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아세테이트 소재의 코받침과 템플이 천천히 체온을 받아들였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물기 대신에 청량감을 품고 있다. 리넨셔츠를 옷장에 집어넣고 스웻셔츠를 꺼냈다. 가을과 겨울은 뿔테안경 쓰기 좋은 계절이다. 시원한 여름옷보다 따뜻한 겨울옷이 더 잘 어울린다. 옛날 사진 속 나는 니트나 스웨터를 입고 뿔테를 쓰고 있다.


 클리어나 톨토이즈 컬러의 뿔테안경은 종종 착용했지만 검정뿔테는 정말 오랜만에 쓴다. 유행주기는 계속해서 더 짧아지고 있지만 검정뿔테안경의 입지는 여전히 공고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유행을 타지 않는다. 핸드메이드 안경브랜드들은 5,60년 전에 출시했던 빈티지 뿔테안경을 복각해서 선보이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끊기지 않고 이어질 때 스타일이 완성된다. 트렌드는 변하지만 스타일은 지속된다. 수요도 꾸준하고 마니아층도 건재하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찾는 물건은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이 된다.


 티타늄테를 쓰고 있을 때는 뿔테가 갑갑하게 보였는데 막상 써보면 마음이 달라진다.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아세테이트 소재가 주는 따뜻한 양감이 마음에 들었다. 추운 계절이 되면 서늘한 금속의 감촉보다 합성수지가 품은 부드러운 촉감을 선호하게 된다. 역시 사람은 흔들리는 갈대다. 검정뿔테는 안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쳐가는 통과의례 같은 안경이다. 좋아서 아예 눌러앉는 사람도 있고 벗어나서 새로운 취향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뿔테는 안경생활의 출발선이다.


 20대 내내 뿔테를 쓰고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디자인이나 컬러는 바뀌었지만 제일 오래 쓴 안경은 검정뿔테였다. 그 시절 사진 속의 나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웃고 있다. 나이 말고는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청춘이었다. 젊음은 늘 빈손이다. 손에 꽉 쥐고 놓치지 않을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시기다. 몸으로 부딪히고 수시로 넘어지면서 뛰어다녔다. 늘 걱정이 많았다. 결과는 초라하고 미래는 불안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모여서 늘 서로를 위로했다. 살다 보면 지난 시절이 품고 있는 편안함이 떠오를 때가 있다.


 잊고 지냈던 사소한 것들이 오랜만에 생각나면서 뿔테안경에 눈길이 닿은 것 같다. 어쩌면 검정뿔테안경을 쓰고 지내던 시절의 나를 그리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은 추억이 되고 나쁜 일은 기억이 된다.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맘대로 되는 일도 없었지만 결국 청춘은 추억이 됐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졌다. 작은 일로 고민하고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커다란 뿔테안경을 쓰고 환하게 웃는 20대의 나를 거울 앞에서 마주 보고 있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내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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