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안경

by 김태민

김태민, <타르트옵티컬 ARH>, 종이에 색연필, 14x23cm.

눈이 내린다. 뿔테안경을 꺼내야겠다. 더운 여름보다는 추운 계절이 뿔테와 잘 어울린다. 코트를 입고 빈티지샵에서 구매한 셀룰로이드 안경을 썼다. 10만 원 주고 샀는데 볼 때마다 잘 샀다는 생각을 한다. 두꺼운 셀룰로이드 시트로 만들어서 무겁지만 색감이 좋아서 손이 자주 간다. 뿔테를 선택하면 착용감은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족스러운 디자인과 디테일은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든다. 마니아나 애호가는 합리성보다 심미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안경은 단순한 시력교정도구가 아니라 미적요소를 품은 멋진 피사체다.


정말 잘 만든 안경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조형물이다. 소재가 품은 색감과 광택, 생동감이 느껴지는 유려한 곡선, 깔끔한 마감처리와 흠잡을 데 없는 디테일까지.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푹 빠져든다. 어쩌면 양품(良品)을 선호하는 동물적인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옷을 좋아했던 20대 시절의 나는 다양한 소재의 원단과 패턴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다. 높은 완성도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사물을 보면 종류에 관계없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옷과 안경을 그리고 건축물과 예술작품까지. 모두 균형미와 조형미를 느낄 수 있는 멋진 피사체다.


안경의 아름다움은 형태보다 소재에서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색감이나 양감은 안경 디자인을 형성하고 세월은 안경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셀룰로이드나 아세테이트는 가공역량에 따라 다양한 패턴과 색감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은 깊이를 더해준다. 유행을 탈 수밖에 없는 패션소품이지만 세월은 유행을 초월하는 특별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빈티지 안경에서 느낄 수 있는 잘 숙성된 셀룰로이드의 깊이감은 아름답다. 실상은 합성수지 소재의 화학적인 열화로 인한 변색이지만 미적측면에서 볼 때는 매력이다.


햇빛과 공기에 노출되면서 건조되면 안경표면의 색감이 달라진다. 검은색 셀룰로이드는 세월이 지나면 표면에 은은한 흑갈색 빛이 감돈다. 발효와 부패가 한 끗 차이인 것처럼 미적기준에 따라 멋이 깃들면 낡아도 빈티지가 된다. 톨토이즈나 다크데미 계열은 채도와 투명도가 낮아지고 대비가 줄어들면서 색채의 통일감이 증가한다. 인위적인 느낌의 패턴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러워진다. 호피무늬가 진짜 호피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세테이트 역시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 새 안경의 광택도 매력적이지만 사람과 함께 나이 든 안경의 사용감 역시 멋스럽다.


아세테이트 소재의 뿔테를 몇 년째 쓰고 있다. 빈티지가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사용한 흔적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다이아몬드 모양 리벳은 처음보다 광택이 줄었다. 매일 쓰다 보니 테가 살짝 틀어졌다. 템플 표면의 작은 흠집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로고는 아직까지 선명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깨끗하게 관리한 편이라 백화현상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상태는 정말 좋은 편이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느낌이 달라졌다. 내 물건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은 사람의 온기를 품고 있다. 사용자가 남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안경도 마찬가지다. 안경은 사용자와 같이 나이 들어가는 물건이다. 낡은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 기호는 취향에서 나오지만 애착은 함께한 시간에서 나온다. 그리고 애착은 애정이다. 오래 쓰다 보면 안경이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사람과 사물이 서로 닮는다. 커틀러앤그로쓰의 두꺼운 뿔테를 쓴 영국 배우 빌 나이, 빈티지 아넬을 착용한 조니뎁, 타르트옵티컬의 ARH를 즐겨 쓰는 윤상을 떠올려보자. 물건이 사람을 담는다. 사람은 안경을 쓰고 안경은 사람을 닮는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2화내 취향이 늘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