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는 추억과 기억이 공존하는 거리다. 세월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대로다. 고등학생 시절 음악하는 친구들과 낙원상가를 종종 찾았다. 기타에서 손을 뗀 지 거의 20년 가까이 지났다. 코드는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2000년대 초반 낙원동의 풍경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주말마다 전시를 보러 종로에 갔다. 삼청동이나 인사동은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쌈지길 지나 안국역 건너 계동까지 하루종일 갤러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점심은 을지면옥이나 삼수갑산에서 해결했다. 주문하면 바로 나오는 이문설렁탕도 단골집 중 하나였다.
2010년대는 북촌로, 율곡로, 자하문로가 주목받던 시기였다. 수요미식회와 셰프테이너들의 등장으로 인해 맛집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노포가 밀집된 종로 일대는 맛집투어의 필수코스가 됐다. 인사동과 삼청동의 인기는 종로 전역으로 확산됐다. 줄을 서는 문화가 이때부터 대중화된 것 같다. 어디를 가든 맛집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서촌을 걷다 출출할 때 사라다빵을 사 먹었던 효자베이커리도 주말만 되면 긴 줄이 늘어섰다. 어르신들이나 동네 주민들이 주로 찾던 광장시장이나 통인시장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늘어난 인파를 피해 나는 을지로를 아지트로 삼았다. 당시 을지로나 성수동은 공업사 골목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핫플레이스를 찾는 사람들은 굳이 남대문로를 가로질러 넘어오지 않았다. 주말 피크타임에 가도 을지로는 늘 여유로웠다. 광통교 근처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낡은 건물들의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느긋하게 눈에 담았다.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길을 지나는 행인보다 짐을 실은 마이다스 오토바이가 더 자주 보였다. 함석 소재의 덕트나 후드를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들이 많았다. 오랜만에 찾은 을지로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한적함은 사라지고 젊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은은한 열기가 감돌았다. 거리 곳곳마다 불경기와 상반되는 활기가 느껴졌다.
핫플레이스가 된 을지로를 보고 있으면 신기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 시절의 을지로가 품고 있었던 온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그늘진 골목이 만들어내는 서늘함과 해 질 무렵 찾아오는 고요함을 좋아했다. PVC 비닐천막 위로 흘러내리는 기름진 질감의 노을이나 비에 젖은 콘크리트 벽이 까맣게 물드는 모습이 예뻤다. 생활감이 눌어붙은 흔적과 밥벌이의 치열함이 풍기는 풍경을 보며 온기를 느꼈다. 오래된 골목 사이에서 피어오르던 밥냄새가 그립다. 고층빌딩이 만드는 기다란 그림자로 뒤덮인 거리는 그때보다 화려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겨울날 해장국을 먹으러 자주 갔던 서순라길이 힙플레이스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둑 두는 어르신들의 사랑방이자 작은 술판이 늘어서있던 거리는 야장의 명소가 됐다. 시간은 똑같이 흘렀지만 서울의 오래된 골목은 명소가 됐다. 한국 어디나 있는 낡은 동네지만 서울이라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뉴트로와 레트로는 일시적인 트렌드를 넘어 주소비층이 탄탄한 장르가 됐다. 공간이 품고 있는 감성과 이미지를 소비하는 세상이 왔다. 낡은 거리에 깃든 과거가 만드는 서사는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감성은 가격표가 붙는다. 돈이 된다.
을지로에 중국인 관광객을 실은 관광버스가 늘어날 무렵 나는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 눈에 들어온 곳은 이태원이었다. 낡은 빌라에 딸린 공동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경리단길이 뜨면서 월세가 올라 작업실은 문을 닫았다. 철공소 골목이 있는 문래동, 수제화와 구두공방이 있던 성수동, 지금은 마용성이 된 용산 한강대로까지 길든 짧든 전부 인연이 닿았던 곳들이다. 어쩌다 보니 젠트리피케이션을 경험하면서 20대를 보냈다. 30대 초반에는 장충동을 좋아했다. 낮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동네의 특유의 분위기가 아늑한 곳이었다. 최근에 장충동이 뜨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