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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Oct 31. 2024

무라카미 하루키와 강남 교보문고 그리고 아메리카노

 친구를 만나러 오랜만에 강남까지 나왔다. 지하철 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단편집을 읽었다. 10번 출구로 나와서 천천히 걸었다. 도로 위를 지나는 차량행렬과 간판에서 쏟아져 나온 환한 불빛들 사이로 사람들이 점멸하듯이 움직였다. 퇴근시간 풍경은 어디나 똑같다. 하루치 활기를 전부 소모한 지친 얼굴들이 거리 위를 둥둥 떠다녔다. 약속시간보다 빨리 도착해서 여유가 생겼다. 느긋하게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건조한 더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계단으로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벽이나 바닥이 깨끗해서 전시용 모델하우스가 떠올랐다. 층계참을 밟고 내려가는데 커피가 담긴 테이크아웃 컵이 한쪽 구석에 놓여있었다. 컵홀더에 인쇄된 단풍나뭇잎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길건너에 있는 카페 팀홀튼의 로고다. 반쯤 남은 커피는 아메리카노 같았다. 몇 걸음만 내려가면 교보문고다. 쓰레기통이 매장에 비치되어 있을 텐데 굳이 왜 계단에 두고 갔을까? 절반쯤 마시다 질렸는데 버릴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계단에 놔둔 것 같다. 서점 내부에 있는 쓰레기통을 찾는 일도 번거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귀찮아지면 충동이 상식을 이긴다.


 평소라면 주워다 쓰레기통에 버렸겠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쳤다. 퇴근시간에 서울지하철을 타고 강남까지 나오느라 조금 지쳤다. 귀찮았다. 테이블에 앉아서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단편 중에서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등 뒤에 붙어 다니기 시작한 가난한 아주머니라는 존재가 비현실적이라 재밌었다. 하루키의 단편소설은 공상과 상상, 상식과 망상의 경계를 허문다. 장편소설은 비교적 뚜렷한 주제의식을 품고 있지만 단편이나 엽편은 대체로 판타지에 가깝다. 그래서 단편소설을 더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휘발성이 강한 미묘한 감정이나 순간적인 인상을 문장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소설 속에 심오한 의미나 어려운 통찰은 없다. 그냥 읽고 받아들이거나 그대로 넘기면 그만이다. 오래전부터 하루키 특유의 가벼움과 산뜻함을 좋아했다. 형이상학적인 표현이나 조금 뜬금없는 묘사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맘에 든다. 현실은 늘 불확정성이 지배한다. 앞날은 알 수 없고 미래는 볼 수 없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에 역설적으로 현실성이 반영되어 있다.


 삶은 이벤트 혹은 액시던트다. 예측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서프라이즈의 연속이다. 안 좋은 일은 사건이나 사고로 분류하지만 의미는 발생한 후에 덧붙이는 감상일 뿐이다.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계획이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늘 새롭고 항상 낯설다. 포켓몬 빵에 들어있는 띠부띠부씰을 뜯는 것처럼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다. 미뇽을 갖고 싶었는데 질뻐기가 나왔을 때의 실망감과 생각 없이 뜯었는데 뮤가 나왔을 때의 짜릿함 모두 들어있다. 어쩌다 보니 누군가 계단에 버리고 간 커피를 소재로 글을 쓰게 됐다. 강남 교보문고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버려진 커피가 문장 속에 뒤섞였다.


 친구와 같이 애플 스토어를 들렀다 나와서 아웃백에서 밥을 먹었다. 평범한 수요일 저녁이 금세 지나갔다. 돌아오는 2호선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현관문을 열고 옷을 벗고 곧바로 씻었다. 몸에 들러붙어있던 피로감이 깨끗이 녹아내렸다. 책을 읽으려다 말고 침대에 누웠다. 불과 20분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다. 누워서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본다. 계단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컵이 떠올랐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컵을 쓰레기통 대신 글 속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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