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PEARL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Nov 19. 2024

채우려 할수록 삶은 괴로워진다

 삶은 결과와 과정의 지루한 반복이다. 목적지까지 가는 지겨운 과정 끝에 찾아오는 행복은 찰나와 같다. 찬란함은 섬광과 같아서 잠시 반짝이다 이내 추억 속에 박제된다. 다시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산을 넘으면 강이 나오고 가까스로 건너면 이제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있다. 먼저 떠난 이들의 등을 이정표 삼아 뛰어들면 망망대해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구조신호를 보낸다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조난자들은 풍랑을 만나 무너지거나 알아서 파도의 그림자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정신을 차리고 방황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1인분을 하려고 악착같이 살아야만 한다. 사람구실 못하는 낙오자가 될 수는 없다. 과업은 끊임없이 주어진다. 교복을 벗고 건네받는 학생증은 어느새 사원증이 된다. 이름 뒤에 붙는 직함을 위해서 밤낮없이 일한다. 2,30대를 갈아 넣은 대가는 은행 빚을 끼고 산 아파트 한 채다. 책임과 의무는 갈수록 늘기만 한다. 결코 줄지 않는다. 가장의 무게와 떨어지는 체력을 실감할 때쯤 아직 살날이 한참 남아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가능성과 희망이라는 단어는 복권을 긁는 것처럼 벗겨져나간다. 이제 삶이 다르게 보인다.


 죽을 때까지 쉴 틈이 없다. 소망하고 성취하는 이상적인 삶과 내 인생의 거리감을 가늠해 본다.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남아있다. 그 일을 다 끝내고 나면 또 다른 일들이 내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죽기 전날까지 우리는 삶이 주는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예외는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이자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다. 끝은 없다. 죽으면 그때 제대로 쉴 수 있다. 그렇다면 힘을 좀 빼고 살아도 상관없다. 애초에 바다 한가운데 결승점 따위는 없다. 그건 사람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불과하다. 시켜 먹으려는 인간들은 널려있지만 어디에도 책임자는 없다.


 발버둥 치면서 치열하게 살아봐야 갈 때는 옷 한 벌 그리고 관 한 칸이다. 남는 것은 없다. 삶은 종이 두 장에 불과하다. 인간은 출생증명서와 사망진단서로 살다 간 흔적을 기록한다. 먼저 살다 간 이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갖다 붙여서 인생을 포장한다. 죽으면 다 끝난다는 공허감을 감추려고 갖은 방법으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면 염세적인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진실은 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받아들이면 편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억지로 애써 의미를 부여하느라 삶이 괴로운 것이다. 어떻게 살든 인간은 죽을 때가 되면 다 후회한다.


 이정표처럼 보이는 손가락을 따라가면 행복과 안정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돌변하면 내 선택을 비난하는 손가락질로 되돌아온다. 뜻대로 되는 일보다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이 훨씬 많다. 날씨와 인생은 변화무쌍해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좋은 예감은 착각이고 슬픈 예감만 정답이다. 우리는 다들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살아있는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확률이 한 번이라도 빗나가면 곧바로 죽는다. 목숨은 바위보다 무겁지만 죽음은 바람처럼 가볍게 달려든다. 삶은 과정과 결과의 반복이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 복잡한 철학이나 숭고한 가치는 거추장스러운 옷이다. 벗어버리고 벌거숭이가 되면 현실이 아니라 진실이 보인다.


 뭘 하든 후회가 남는다면 그냥 고정값으로 삼는 편이 낫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되는 데까지 살다 가면 그만이다. 죽을 때까지 성실하게 쌓은 명성이나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은 후손들의 후광이 될 뿐이다. 죽는 순간 두 손에 쥐고 가는 것은 아쉬움과 미련이다. 보이지도 않는 목적지를 행복으로 규정할 생각은 없다. 남들이 멋대로 정한 결승선을 향해 달릴 마음도 없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피로감을 동반한다. 가치나 목적지 같은 단어를 내다 버리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채우려고 할수록 삶은 더 괴로워진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속을 비워내고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털어내고 떨쳐내고 비워야 나아진다. 그것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