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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13. 2024

냉장고 비우기

 냉장고를 비우는 중이다.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쌓아놓은 반찬통을 꺼내서 일일이 확인한다. 집에서 밥먹을 사람이 없다. 부모님은 병원에 계신다. 입원한 엄마와 간병하는 아버지는 이제 병원이 집이다. 혼자 남은 이후로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다. 가능하면 식사는 밖에서 해결했다. 쉰 된장국을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맛이 간 무조림, 식초냄새가 나는 묵은지, 말라버린 고등어까지 전부 다 버렸다. 음식물쓰레기봉투는 금세 가득 찼다. 토마토와 감귤도 꺼냈다. 채소 칸의 가지와 단호박은 눈을 맞은 것처럼 하얀 곰팡이를 달고 있었다.


 음식물쓰레기는 여덟 봉지 넘게 나왔다. 반찬통을 설거지하고 세정제로 냉장고를 닦았다. 재활용품을 넣어둔 박스와 같이 밖에 내다 버렸다. 상태가 멀쩡한 반찬은 아버지의 도시락 반찬이다. 아직 엄마의 손맛이 남아있다. 빈자리는 티가 난다. 불을 켜놓고 TV 볼륨을 높여도 거실은 찬 공기만 맴돈다. 온기가 사라지면 사람이 있던 자리를 외로움이 차지한다. 아무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면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변한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창문을 열었다. 일상은 그대로다. 마음이 좀 힘들었지만 달라진 환경에 차츰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엄마는 가끔씩 늦은 저녁에 대청소를 했다. 집안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이라 나도 엄마를 닮았다. 우울하거나 괴로울 때 방청소를 했다.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하고 쌓아놓은 물건을 내다 버렸다. 주기적으로 옷장과 책상을 비웠다. 주변을 깨끗하게 치우고 나면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내면을 뜻대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사는 공간은 정리할 수 있다. 청소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찬 공기를 마셨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냉장고를 열었다. 깔끔해졌다. 며칠 전부터 치워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냉장고를 비우는데 작은 결심이 필요했다. 머릿속에 익숙한 모습으로 식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미련하게 미련을 안고 있었다.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생각을 그만두고 몸을 움직였다. 실행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해냈다. 음식물쓰레기와 함께 미련을 버렸다. 이제 다음 용기를 낼 차례다. 밥솥은 계속 비어있다. 혼자 먹는 밥이 익숙하고 요리도 그럭저럭 하는 편이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쌀을 꺼내다 씻어서 밥을 안쳤다. 집 앞 마트에서 계란 한 판을 사 왔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대파를 잘라 넣었다. 갓 지은 밥과 계란을 넣어서 센 불에 빠르게 볶았다. 굴소스와 간장으로 맛을 내고 그릇에 옮겨 담았다. 오랜만에 볶음밥을 먹는다. 익숙한 맛이 반갑게 느껴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모래 씹는 것처럼 밥맛이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졌다. 삶의 의지는 가슴이나 머리가 아니라 배에서 나온다. 따뜻한 밥으로 배를 채웠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곧바로 설거지를 끝내고 손도 씻었다. 소파에 앉아서 뉴스를 틀었다. 금방이라도 가족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현관문으로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감정을 덜어내기 힘들 때 나는 이불속에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틀어박혀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나만 놔두고 지나간다. 아무리 자도 하루는 너무나 길다. 우울감만 끝없이 이어진다. 방구석에 틀어 박히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이제는 몸을 강제로 움직인다. 산책이나 운동을 하고 샤워로 마무리하면 몸도 마음도 개운해졌다. 감정에 매몰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스장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마음을 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갑다. 그래도 비우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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