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이 세상 모든 것들에는 향기가 있다.

by 김태민

5시 50분.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깨면 나는 제일 먼저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한다. 몇 번째 알람을 듣고 일어났는지 보고 끈 다음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연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밀려들어오면 잠이 덜 깬 머리에 스위치가 켜지듯 의식이 들어온다. 창문을 열어둔 상태로 얼마간 찬바람을 맞는다. 코끝에 닿은 새벽 공기는 비강을 거쳐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간밤의 기분 나쁜 꿈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 속에 미미하게 섞여 있는 흙냄새와 나무냄새가 참 좋다. 사람과 사물뿐만 아니라 계절에도 고유한 향기가 있다. 그리고 이 고유한 향기는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분감 있는 공기 중에 스며있는 흙냄새를 맡으면 다가오는 봄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떨어진 나뭇잎이 말라가는 냄새에서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향기는 곧 존재감을 의미하기에 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이나 풍경, 내가 경험했던 순간들을 냄새를 통해 기억한다. 오래된 음악을 들으면 처음 들었을 때의 시절이 떠오르는 것처럼 나는 후각을 통해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을 동기화한다. 시각이나 청각 같은 다른 감각들 역시 이런 동기화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후각이다. 도서관의 서고 한 편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펼치면 노랗게 변색된 마른 종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낡은 나무 책장이 줄지어 서있던 대학교 1학년 때의 낡은 도서관을 떠올리게 된다. 바코드 인식이 잘 되질 않아 일일이 카운터에 있는 아르바이트생이 수동으로 열어야했던 도서관 출입문. 출입구 오른편에 놓여 있던 자료검색용 컴퓨터는 익스플로러를 화면에 띄우는 것도 벅찰 만큼 느렸다. 책을 빌리고 반납 하던 카운터 뒤편에는 수리해야할 망가진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창문 밑으로 줄지어 놓인 낡은 나무 책상 위에는 학생들이 읽다가 놔둔 책들이 멋대로 나뒹굴었다. 10년 지난 기억임에도 생생하게 떠오는 이미지들. 시간이 지나도 향기로 기억되는 풍경은 결코 변색되지 않는다.

후각이 민감한 나는 향기에 많은 신경을 쓴다. 나만의 향기를 갖는 것에 많은 공을 들이기도 했고 지금도 몇 가지 향수를 조합해서 뿌린다. 베이스 노트가 유난히 좋은 향수는 입고 나갈 옷을 골라 전날에 미리 뿌려두고 잔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예전에는 향초를 사 모으기도 했고 블로그에 올라오는 후기를 읽어가며 좋은 냄새가 나는 제품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과 공간 그리고 물건을 좋아한다. 향기는 곧 존재감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촉매제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만의 또렷한 향기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 많은 것들이 변해도 향기가 불러오는 이미지는 한결같음을 알기에 나는 욕심을 부린다.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남고 싶다.

사람이 향기로 기억되는 만큼 함께 했던 사람의 향기 역시 기억에 남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맡은 랑방의 매리 미나 따뜻한 체온에 기화한 화이트 머스크향 바디로션은 잠시 동안 나를 멈칫하게 만든다. 유통기한이 지난 추억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한 감정으로 인해 아름답지도 빛나지도 않지만 짧은 순간.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거나 활발하게 구동하던 머릿속의 사고회로를 정지시켜버린다. 기억 속의 풍경이 변하지 않았듯 반쪽짜리 추억도 향기 속에 남아있다. 방부제를 가득 부어놓은 수입산 과일처럼 조금은 불편한 모양과 빛깔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시절의 냄새다.

불편한 기억과 반대로 기분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냄새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카페에서 몇 시간동안 대화를 나눈 다음날. 입고 나갈 옷을 고르다 전날 입은 코트에 밴 커피 향에 행복했던 시간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햇살 좋은 날 옥상 에 반나절 동안 널어놓은 이불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도 역시 기분 좋은 편안함을 준다. 애견카페에서 만난 귀여운 보더콜리가 내 품안으로 들어오며 풍기는 강아지 특유의 냄새도 좋다. 후각을 통해 형성된 편안함은 여러 개의 추억을 동기화 시켜 불러온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대와는 상관없이 아주 짧은 순간동안 머릿속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행복의 이미지들. 또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내면에 자리 잡은 행복했던 순간의 흔적들이 기분 좋은 냄새에 반응하며 떠올랐다 사라진다. 꽃이 피었다 지듯 환한 햇살이 구름 밖을 나왔다 다시 사라지듯 행복감을 남기고 간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냄새들을 떠올려봤다. 세탁한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 갓 구운 크로와상의 고소한 냄새. 카페 문을 열면 맡을 수 있는 진한 커피 향. 블렌더 갈아 만든 딸기주스의 상큼한 향기.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으면 느낄 수 있는 체취. 체온에 기화하는 로션의 향. 헌책방에 쌓여있는 오래된 책들이 뿜어내는 마른 종이의 냄새. 긴 머리에 잘 스며든 헤어 에센스 냄새. 돌솥에 지은 밥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 핫케익 위에 잔뜩 바른 버터와 메이플 시럽 냄새. 포장을 막 뜯은 셔츠의 냄새. 짙은 안개가 자욱한 아침의 냄새.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올라오는 흙내음. 달아오른 볼에서 피어나는 파운데이션 향. 봄날의 매화와 늦가을 국화의 향기. 그리고 산이 있는 곳 어디서든 맡을 수 있는 산의 냄새. 좋아하는 냄새를 맡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살아 있다는 현실감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은 먹었을 때의 만족감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때의 충만함처럼. 좋은 향기는 살아있음의 의미를 또렷하게 되새겨주는 역할을 한다.

오늘 아침은 전날 내린 봄비 덕분에 공기가 촉촉하게 젖어있다. 건조한 겨울 아침의 냄새와는 다른 물기 머금은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은 평범한 아침이지만 기분이 좋다.

keyword